김대중 내란음모사건 자필 진술(下) "미국 교포들의 ‘망명정부 수립' 제안 거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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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초승인 2018.11.29 13:41:18
  • 최종수정 2018.11.30 1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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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이 문건은 1980년 5월 17일 심야, 신군부 세력에게 연행당한 김대중 전 대통령이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으로 기소되어 수사를 받는 과정에서 자필로 기록한 정치 이력이다. 두 차례의 진술서에는 김대중의 해방 후 활동 행적, 6·25 당시의 인민재판 목격담, 목포에서 인민군에게 체포됐다가 기적적으로 살아난 과정, 좌익사상 문제로 의심받게 된 계기, 미국과 일본에서의 한민통(재일한국민주통일연합) 결성과 관련한 자기고백 등이 기록되어 있다. 이 진술서를 통해 김대중 씨는 "해방 후의 편력에 대해 너무도 사실과 다른 말과 중상이 횡행하는 것을 보고 치욕과 분노의 심정을 금치 못했다"면서 이 기회를 이용해 그간의 오해를 불식시키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는 심정을 피력했다. 또 망명생활 과정에서 결성한 미국과 일본의 한민통도 순수한 민주주의 회복 차원에서의 행보였으며, 해외교포 중 동기가 불순한 자들에게 이용되지 않도록 주의하고 노력했다고 말했다. 수사과정에서 1980년 5월 20일, 5월 25일 두 차례에 걸쳐 작성된 김대중 진술서를 현재의 맞춤법에 맞게 고치고 읽기 좋게 긴 문장을 자르는 외에 원문 그대로를 상·하 두 차례로 나눠 게재한다.
1980년 내란음모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은 김대중 전 대통령. (연합뉴스 제공)
1980년 내란음모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은 김대중 전 대통령. (연합뉴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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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내란음모사건 피의자 진술서 제2회(1980년 5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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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1972년 10월 17일~1973년 8월 8일까지의 해외활동 개략

 

1. 본인은 신병치료차 1972년 10월 11일 일본 도쿄(東京)에 갔다 거기서 유신선포를 맞이했습니다. 당시 국내 상황으로 보아 귀국해 가지고는 신상이 위험함은 물론, 유신체제에 대한 어떠한 반대활동도 불가능하다는 판단 아래 미일 양국에서의 망명을 결심하고 10월 18일 유신 반대를 성명했음.

2. 본인은 그 후 미일 양국을 왕래하면서 기자회견, 강연, 양국 정치인의 접촉,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한민통)의 결성 준비 등으로 유신반대와 민주회복 활동을 전개하다 1973년 8월 8일의 납치사건으로 귀국하게 되었음.

 

Ⅱ. 기자회견과 강연내용의 개략

 

1. 본인은 해외체류기간 중 동경 외신기자 구락부에서의 2회 강연, 일본의 '주간 아사히(朝日)', '주간포스트', '내외타임스', '세계'(월간지) 등과 회견했으며 미국의 '이브닝 스타'(워싱턴), '샌프란시스코 크로니컬', '댈러스 트리뷴'(텍사스), '뉴욕 타임스'와 회견 또는 기고했음.

2. 강연은 일본에서는 한국청년동맹(한청) 연수회에서의 강연(1972년 11월), 동경 및 가나가와(神奈川) 민단 주최 입관법(入管法) 연수회에서의 강연(1973년 3월), 자민당 의원으로 구성된 AA연(아시아 아프리카 연구회)에서의 강연(1973년 2월경), 그리고 미국에서는 재미교포에 대해 워싱턴, 뉴욕, 시카고, 샌프란시스코, 세인트루이스 등에서 현지 교포 주최로 강연을 했으며 시애틀의 워싱턴대학, 미주리 주립대학, 웨스트 민스터 대학(미주리주) 등에서는 각 대학 주최로 강연을 했음.

3. 각 장소별 강연내용은 지금 정확히 기억나지 않으나 다음과 같은 내용이 주요한 것이었다고 기억됨.

첫째, 10월유신은 본인이 1971년 대통령 선거 당시 경고했던 총통제 바로 그것이다. 10월유신은 통일을 위해서 선포한 것이 아니라 박정희 씨 한 사람의 영구집권을 위해 만들어 진 것이다. 이와 같은 독재체제 아래서는 자유와 정의가 말살되고, 자유와 정의가 없어지면 국민의 자발적 정부지지와 협력이 없어지기 때문에 반공도 안보도 되지 않으며, 자신을 가지고 통일에 임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국민을 불행으로부터 구하고 나라의 운명을 위기로부터 건지려면 민주회복을 서둘러야 한다. 민주주의만이 국민의 자발적 지지를 얻으며, 공산당에게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은 6·25사변의 경험으로서도 명백하다.

둘째, 우리의 해외활동에는 두 가지 원칙이 반드시 준수되어야 한다. 하나는 우리가 반대하는 것은 박 정권이지 대한민국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대한민국에 해가 되는 일은 절대 해서는 안 되며, 우리는 대한민국의 절대지지 태도를 각별히 해야 한다. 또 하나는 지금 통일을 위해 국내에서 남북조절위원회가 빈번히 서울 평양 간을 왕래하고 있지만 '사상과 이념을 초월해서 시급히 통일'한다는 그런 합의가 쉽게 이루어지리라고는 안 본다. 그것보다도 국민의 지지를 얻지 못하는 독재정부 가지고는 자신 있게 공산당과 통일을 추진할 역량이 없다. 또 통일문제를 개인의 영구집권에 이용하는 박 정권에게 통일에의 양심이 있다고는 볼 수 없다. 그러므로 해외교포들은 통일의 환상에 빠지지 말고 냉철한 눈으로 통일문제를 보아야 한다. 통일을 위해서는 먼저 이를 해낼 수 있는 민주정부가 서야 한다. 선(先) 민주회복 후(後) 통일추진의 원칙을 명심해야 한다.

셋째, 나의 통일론은 1972년 이래 국내에서부터 주장해온 3단계 통일론이다. 즉 평화공존, 평화교류, 평화통일이다. 그중에서 먼저 평화공존부터 시작해야 한다. 남북은 전쟁금지, 동시 유엔가입, 동시외교를 당면목표로 영연방제와 같은 느슨한 연방제 아래 점진적 통일의 제1기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이때 남북은 각기 주권국가이며 내정의 상호 불간섭 원칙이 지켜져야 한다. 이러한 평화공존이 실현되면 남북 간에 연방협의기구를 만들어 각 분야의 교류를 증진시켜 민족적 동질성 회복에 힘써야 한다. 이것이 성공하면 마지막으로 완전통일의 단계에 들어갈 수 있다. 통일은 결코 서두를 수 없는 중대사다. 양측이 완전 납득하고 안심할 수 있는 조건 속에서만 실제로 그 진전이 가능하다.

넷째, 미일 등의 아시아 정책, 대외정책에는 비판받을 바가 크다고 본다. 2차 대전 후 미국은 아시아 도처에서 독재정권을 반공이라는 명분 아래 지원해 왔다. 독재정권은 미국의 원조로 국내의 민주세력을 탄압하고, 국민의 자유를 짓밟아 반공의 기초세력을 파괴하고 국민의 반공할 의지를 상실케 해왔다. 지금 일본이 이와 똑같은 길을 걷고 있다. 이래가지고 공산주의의 위협으로부터 아시아를 구할 수 없으며 머지않아 월남이나 캄보디아에서 실패할 것이다. 그런 위험스런 길을 한국에서도 걷고 있다.

내가 미국이나 일본에서 말하는 것은 한국에의 무슨 내정간섭을 요구하거나 나에 대한 각별한 지원을 요청하는 것이 아니라, 미국의 대한(對韓) 원조가 그 지원 목적인 한국의 민주주의를 튼튼히 해서 국민의 자발적지지 아래 공산침략으로부터의 안보태세가 강화될 수 있는 그런 방향으로 쓰여지도록 지원을 해 달라는 것뿐이다. 나는 미군 철수나 대한 원조중지를 반대한다. 이는 박 정권만이 아니라 대한민국 정부의 존립을 위태롭게 하기 때문이다.

 

Ⅲ. 한민통의 조직(미국)

 

1. 본인은 1973년 6월부터 해외에서의 반정부 운동을 좀 더 조직적이고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 미국에 한민통 임시 총본부를 두고 그 산하에 미국지부, 일본지부, 캐나다지부를 두고자 모색했으며, 총본부 의장에는 본인이 앉고 미국지부 의장은 안병국 목사, 일본지부 의장에는 김재화 씨, 캐나다지부 의장에는 이상○ 목사(편집자 주 : 원본불량으로 확인 불가)를 내심 지목하고 있었음.

2. 1973년 7월 6일 워싱턴 소재 메이플라워 호텔 회의실에서 미국 한민통 결성준비위원회가 열렸는데 참석자는 김규홍, 안병국, 임병규, 문명자, 동원모 등 약 1백 명 가량이었으며 준비위원회 의장에는 안병국, 부의장에는 동원모 기타 약간 명의 준비위원이 선출되었음. 여기서 본인은 한민통의 방향으로서 2대 원칙, 즉 대한민국 절대지지, 선 민주회복 후 통일추진 두 가지를 제시하고 이를 한민통의 기본원칙으로 채택시켰음.

3. 이 회의 석상에서 최석남 예비역 육군 준장 등이 '망명정부의 수립'을 제안하고 준비위원장이 이를 검토사항으로 채택하려 하자 본인은 이를 저지하고 "그러한 일이야말로 대한민국을 해치는 일이다. 지금은 일제시대가 아니다. 왜 망명정부냐? 그리고 우리는 박 정권을 인정 않는 것이 아니라, 인정하면서 이를 민주정부로 교체시키자는 것이다. 그러한 제안은 우리 운동의 원칙과 전적으로 배치되니 취소해 달라" 해서 취소된 사실이 있음.

4. 재미 한민통은 그 후 본인이 납치된 후에 결성했으며 지금까지도 존속하는데, 그 자세한 활동사항은 모르나 최근 본인이 여기 들어온 5월 17일에 본인의 집을 방문한 동원모 부의장의 말에 의하면 미국 한민통은 지난 1973년 발족 이래 본인이 제시한 2대 원칙을 고수해왔으며, 재미교포 단체 중 가장 대한민국 지지에 충실해 왔다고 말하는 것을 들은 바 있음.

이때 본인은 "2~3개월 전 이근팔 씨로부터 온 편지에 인쇄된 재미 한민통 회원 명단을 보니 본인이 명예의장으로 되어 있던데 본인은 해외의 어떤 단체에도 이름을 걸 수가 없으니 삭제해 달라"고 요청하여 동원모 씨는 미국에 돌아가서 조치할 것을 약속했음.

 

Ⅳ. 한민통의 조직(일본)

 

1. 본인은 1973년 7월 8일 일본 동경에 도착했는데 방일목적은 첫째, 일본서 출판 준비 중이던 <독재와 나의 투쟁>이란 본인의 해방 이래의 정치편력을 실은 저서의 최종 교정을 보아주기 위한 것이고, 둘째는 당시 케네디, 라이샤워, 코헨, 아슈모어(캘리포니아 산타바바라에 있는 민주주의 연구소 대표) 등 미국 측 인사와 자민당 AA연 소속 국회의원, 그리고 본인 등 3자간에 이야기가 진행 중이던 한국문제를 주제로 한 한미일 3국 합동 세미나의 준비를 위한 일본 측과의 타합(회합을 뜻하는 용어 : 편집자 주), 셋째, 한민통 일본지부의 결성준비였음.

2. 본인은 일본에 도착하여 4~5일 후 김재화, 배동호, 조활준, 김종충(본인의 신안군 하의국민학교 동기생) 등을 만나 지난 3일 본인이 미국으로 출발 시 당부한 동경 민단과 신내천(神奈川) 민단의 민단본부에 복귀 건에 대해서 그 경위를 들은 바 그간 동경방직 이사장 허필석 씨의 적극적인 주선과 주일공사 김재권 씨의 찬동에도 불구하고 민단본부 측의 불응으로 복귀가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말이었음. 그리고 본인이 미국 한민통 결성준비위원회의 경위를 설명한 바 그들이 일본에서의 결성도 제의하므로 후일 만나서 협의키로 하고 헤어짐.

3. 그 후 본인은 저서 교정과 한미일 세미나 관계 타합에 바빠서 민단 비주류 측과 더 접촉을 못하던 중 8월 초에 조활준 씨로부터 한민통 결성 건으로 여러 사람이 같이 만나서 타협하고 싶다는 민단 비주류 측의 통고를 받고 8월 4일 우에노(上野)의 다카라야(寶屋) 호텔에서 만나기로 함.

본인은 8월경 평소 자주 출입하고 여러 가지 신상문제(입적문제, 귀국여부 문제 등)를 협의해 오던 1951년 이래의 지우인 동경 한국 연구원장 최서면 씨를 만나 민단 비주류 측과의 한민통 결성에 대한 그간 행동의 가부, 그리고 결정적으로 본인이 미국 한민통 준비 시 제시한 2대 원칙(대한민국 절대지지, 선 민주회복 후 통일추진) 외에 조총련과의 8·15 공동행사의 포기를 포함시켜서 요구코자 한 다음 계획에 대한 최 씨의 견해 등을 물었음.

본인이 특히 최 씨에게 사전 상의한 것은 그가 일본사정을 잘 알고 있으며, 철저한 반공주의자이며, 당시 가네야마(金山) 전 주한대사(본인의 일본에서의 신원보증인)와 같이 이 연구소를 운영하면서 박 정권의 수뇌부와도 아주 긴밀한 위치였기 때문임. 그러자 최씨 는 "민단 비주류의 본부에 대한 도전은 서로간의 세력다툼이지 사상문제로 보지 않는다. 그들이 그러한 3개 원칙을 수락하면 비주류는 대한민국 지지의 편으로 잡아두는데 도움이 될 것이니 같이 한민통을 결성하는 것이 좋겠다"고 조언을 해 주어 본인은 마음을 굳히게 되었음.

4. 8월 4일 우에노에 있는 다카라야 호텔에 갔더니 김재화, 배동호, 조활준, 곽동의 등 14~15명이 방 안에 있었음. 김재화 씨가 한민통 결성을 위해 이야기하자고 말을 꺼내자 본인이 앞서 말한 3개 원칙을 제시하고 그 합의 위에서 이야기를 진행시키자고 제안했음. 그러자 곽동의 외 1인이 "본국에서는 통일을 위해 남북 간에 왕래가 빈번한데 우리도 같이 국경일쯤 축하하는 것이 무엇이 나쁘냐"고 반박했음.

본인은 이미 1972년 2월 본인이 일본에 들렀을 때 주일 대사관 직원으로부터 "곽동의는 사상적으로 의심스러운 자이다. 그는 김재화 씨의 사위인데 이북에 다녀온 것으로 본다"는 말을 들은 바 있어 그의 말에 긴장이 된데다 좌중이 모두 침묵을 지키는 데 기분이 상하여 "본국 정부가 하는 것과 여러분이 하는 것이 다르다. 여기서 공동행사를 하면 민단 본부가 해야지 왜 당신들이 해야 하느냐. 그러나 여러분이 공동행사 하는 것을 나는 막을 의도는 없다. 나는 일본서 한민통을 만들더라도 반드시 여러분과 같이 해야 한다는 이유도 없다. 여러분과 나는 견해가 다르니 이 이상 더 논하지 말고 그만두자. 나는 가겠다"고 퇴장하였음.

5. 다음날 김재화, 배동호, 조활준 씨 등이 본인을 호텔로 찾아와 "어제 당신이 간 뒤로 많은 사람들이 곽동의에 대해 반박하고 당신의 의견을 따르기로 결정했다. 그러니 한민통을 같이 결성하자"고 하기에 본인은 "한민통은 절대로 그 사상성이 본국에서 오해받아서는 안 된다"는 점을 역설하고 본인이 일본에 있는 한국인 기독교 목회자와 대학교수들도 포함시켜서 민단 비주류의 재판이 안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그들도 이에 찬동했음.

그리하여 우선 발기준비위원자 약간(약15~20명 가량)을 선정하여 8․15날 히비야(日比谷) 공회당에서 민단 비주류만의 주최에 의한 경축식과 본인의 강연이 있은 뒤 그 준비위원 명단을 발표하고 미국과 같은 식으로 준비위원회를 위촉시키고 결성에 관한 모든 문제는 그 후에 논하기로 하고 헤어졌음.

6. 그 후 8월 8일 본인이 돌연 납치되어 귀국함으로써 그 이상의 모임은 갖지 못한 채로 끝났는데 본인이 1973년 10월 26일 연금이 풀린 후 11월 초에 내방한 당시 서울 주재 일본특파원들이 와서 일본서 한민통을 8월 15일에 결성했으며 본인을 의장으로 선출하고 김재화 씨를 의장대행으로 했다는 말을 들었음.

7. 그 후 1974년 2월에 일본 NTV의 기자인 나카무라(中村) 씨가 한국방문 중 찾아와서 "일본서 김종충 씨를 만났는데 당신의 하버드 대학 유학을 위한 출국 가능성을 알아보라고 하더라"고 하기에 출국 가능성이 없음을 말해주면서 "그런데 일본서 한민통을 결성할 때 나를 의장으로 했다는데 그것은 아주 잘못되었다. 왜 국내에 있는 나를 거기 넣느냐. 가면 단단히 전해 달라"고 부탁한 바 있음.

8. 1974년 8~9월경 김녹영 의원이 일본 가는 길에 김종충 씨를 만나서 한민통 의장에서 본인 명의를 뺄 것과 내가 일본서 말한 3대 원칙을 준수해서 본국에 있는 나에게 누를 끼치지 않도록 특히 당부해 달라고 말한 바 있음. 그 후 돌아와서 이야기가 "3대 원칙은 준수하도록 김종충 자기가 계속 지켜보고 주의시키고 있다. 그러나 의장 명의를 빼는 것은 지금 본인의 구출운동에 애쓰고 있는데 그 운동에 지장이 있으니 적절한 시기에 보아서 뽑도록 하겠다"는 회답을 받았음.

9. 그 후 본인은 1976년 3월 8일 명동성당에서 3월 1일 있었던 민주구국선언사건으로 체포되어 1978년 12월 27일 출감 시까지 교도소 또는 서울대법원에 구속되었음. 본인이 석방 후 작년(79년) 초에 아내로부터 일본 한민통이 반국가단체로 대법원에서 판시되었다는 말을 듣고 본인이 취해야 할 대책을 검토 중 마침 동년 2월 경에 미국에 있는 U.S. ASIAN NEWS의 대표이며 미국 여기자협회 부회장인 문명자 씨로부터 전화가 와서 전화 인터뷰를 하게 되었음. 문 여사 말이 일본 한민통의 의장으로 있는데 이를 수락한 사실이 있는가. 자기네 일방적으로 이름을 쓰고 있다는데 어느 쪽인가라고 질문하기에 나는 의장직에 선출되었다는 통고를 받은 바도 없고 수락한 일도 없다. 분명히 말해서 나는 재일 한민통의 의장이 아니다고 답변하자 그렇다면 그대로 보도해도 좋으냐?고 묻기에 좋다. 꼭 보도해 달라고 답했음.

그 후 본인이 문명자 씨에게 한 재일 한민통의 미군철수 주장에 대한 비난발언, 그리고 임창영, 윤이상 등 친북인들과 같이 해외 한국교포회의 개최 부당성 지적발언과 더불어 미국의 거의 모든 교포신문, 그리고 일본의 일반 신문들에 났다고 들었음. 본인도 어떤 교포신문 기사에 대서(大書)되어 있는 것을 본 사실이 있음.

10. 그 후 본인은 작년 1년 중 9개월을 연금 중에 있다가 작년 12월 8일에야 이것이 풀렸음. 금년 2월에 한국 방문 중 본인을 찾아온 일본 시사통신 기자 나가누마 씨로부터 김종충 씨를 만났더니 곧 한민통 대회를 해서 김대중 씨 이름을 의장에서 빼도록 했다. 본인도 이제 한민통을 그만 두어야겠는데 이제까지 김대중 씨 구출운동에 신세를 져놓고 이제 상황이 달라졌다고 나까지 한꺼번에 이름 빼는 것은 의리부동한 것 같아 고뇌 중이다라는 말을 듣고 본인은 사소한 의리관계에 구애말고 김종충 씨도 이름을 빼는 것이 좋겠다. 김종충 씨는 원래 나의 친구로서 거기 참가했던 것이지 그들과 같이 활동해 온 것이 아니지 않느냐고 말해 보았음.

 

Ⅴ. 임창영 북한 방문 기도 사건

 

1. 본인은 1972년 11월 말 미국으로 건너가자 당시 뉴욕 근교인 뉴저지 주립대의 교수로 있는 임창영 씨가 그 신분이 목사일 뿐 아니라 민주당 정권 시 유엔대사였던 관계로 그의 사상을 추호도 의심치 않고 서로 접촉하고 연락을 취했음.

2. 그러나 1973년 5월 말경에 이르러 뉴욕에서 만나자 나는 북한 측 초청으로 이북을 다녀오겠다. 내 눈으로 직접 북한을 봐야 판단이 서겠다. 또 김일성을 설득하여 한국의 평화와 통일에 대해서 협력하도록 하겠다는 뜻밖의 말을 했음. 본인은 깜짝 놀라 당신이 북한에 가면 당신과 활동을 같이 해온 우리의 입장도 곤란해지지만 그보다도 대한민국에 타격을 준다. 금년 가을에는 처음으로 유엔에 북한의 옵서버가 오게 되어 있는데 한국의 전 유엔대사인 당신을 초청한 것은 그런데 대한 선전 작전이다. 당신이 북한에 가면 대한민국의 유엔 정책을 비방하는데 말려드는 것이 고작이다. 그리고 당신이 김일성이를 설득한다니 말이나 되느냐. 그런 잠꼬대 같은 소리 말라고 했으나 끝내 듣지 않았음.

그 후 워싱턴으로 돌아와 김상돈, 전규홍 씨 등을 권고해서 설득해도 효력이 없었음. 혹 국무성에서 북한사정을 탐지하기 위해 일부러 보낸 것이 아닌가도 생각되어 당시 국무성 한국부장이며 재미 한국인의 그러한 출입국문제의 실무자이기도 한 국무성의 레이나드 씨를 나오도록 하여 본인이 호텔에서 만나 그 진상을 알아본 바, 레이나드씨 말이 임창영 씨가 단순히 고향방문과 성묘를 위해 간다고 하기에 그러한 인도적 목적의 방문엔 비록 적성 공산국가라도 재입국 비자를 안 줄 수 없는 것이 미국의 법체계이기 때문에 승낙한 것이다. 그런 편법인 줄 몰랐다고 하며 몹시 불쾌해 하는 것을 들었음.

본인은 그날로 다시 뉴욕에 날아가 임 씨를 만나 레이나드 씨와의 대화내용을 말하고, 왜 그런 속임수까지 써서 가려 하느냐. 신중하라고 수 시간을 권유했으나 끝내 불응했음. 다시 워싱턴에 돌아와 레이나드 씨를 재차 만나 임 씨가 도저히 북한방문을 단념치 않는데 그의 방문목적이 인도적 목적이 아닌 정치적 목적인 것을 본인이나 김상돈, 전규홍 씨 등 여러 사람이 보장할 수 있다. 그러니 재입국 비자를 주지 말라고 요청하자 레이나드 씨도 이를 수락하고 임 씨에게 통고하기를 당신의 사정을 가장 잘 아는 김대중 씨가 당신의 북한방문이 정치적 목적이라는 것을 인정했으므로 당신이 말한 고향 방문 운운은 거짓인 줄 알게 되어 재입국 비자 발부방침을 거부한다고 통고하여 임 씨의 북한행은 좌절되었음.

 

Ⅵ. 뉴욕 데모 시의 구호문제

 

1. 1973년 4월에 뉴욕 힐튼 호텔 영빈관에서 본인이 약 1백여 명의 교포에게 강연을 하고, 그 날 뉴욕과 워싱턴 거주 교포들에 의한 유신정권 반대와 민주회복을 부르짖는 가두데모가 있었음.

2. 본인은 이 데모에 참가치 않았으나 그에 참가한 김상돈, 이근팔, 이강호(본인 처남)로부터 자세한 보고를 들은 바에 의하면 데모대가 경찰의 호위를 받으며 시위 중 뉴욕 거주인이며 당시 북한을 다녀온 것으로 알려진 고병철 내외가 유엔군 철수하라 UNCURK 해체하라는 구호를 쓴 피켓을 들고 참가했다고 함.

3. 그러자 이를 본 김상돈 등 기타 참가자들이 이를 항의하고 그런 구호는 시위목적과 다르다고 철거를 요구했으나, 원래 고병철은 말썽 많고 독선적인 자로 나도 시위할 권리가 있다고 내외가 같이 덤벼 반박했다 함.

4. 그래서 김상돈 등은 시위 책임자인 임창영에게로 가서 고병철을 나가도록 하고 불응하면 경찰에 요구해서 축출토록 하자고 요구했으나, 임 씨는 듣지 않았다 함.

5. 그래서 앞서 말한 3명은 다시 고병철 내외에게 가서 피켓을 버리든가 아니면 행렬에서 나가로 집요하게 요구하여 마침내 고 씨 내외는 욕설을 하면서 중도에 물러났다 함.

6. 그 후 시위 해산 시 김상돈, 안병국 씨 등이 단상에 올라 고병철이 내건 유엔군 철수와 UNCURK 해체 주장은 주최 측과 전혀 무관할 뿐 아니라 오히려 이에 절대 반대한다고 되풀이 공고했다고 들었음.

 

Ⅶ. 결언

 

1. 본인은 유신체제는 박 대통령이 그 준수를 스스로 국민 앞에 선서한 국헌을 파괴한 불법행동이며, 둘째 통일을 위해 유신체제가 필요하다는 것은 전혀 허구이며 그의 영구집권을 위한 것에 불구하며, 셋째 유신체제와 같은 억압 아래서는 자유와 정의가 말살되어 국민은 결코 행복할 수가 없다. 따라서 민심은 이반되고 안정이 흔들리므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안보의 요건인 국민의 자발적 지지를 얻을 수 없다. 따라서 공산당과 대결해서 자신 있게 통일을 밀고 나갈 수 없다는 신념 아래서 반대하기로 결심한 것임.

2. 이국 땅에서 갑자기 접하는 유신선포로 당황하면서 즉시 귀국도 생각해 보았으나 당시 이미 국회의원직도 박탈당하고 신분의 안전이 어느 정치인보다 위태로운 상태에 있었던 본인으로서는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음. 더구나 국내에서는 일체의 유신반대운동이 탄압되고 많은 나의 측근 동지들이 구속되어 갖은 고초를 겪고 있는 상황에서 국내에서 유신체제 반대운동을 전개할 여지가 없다고 판단하여 국내에 가족들이 있는데도 단신으로 해외에서 민주회복운동을 전개할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고 판단했던 것임.

3. 그러나 본인은 언제든지 정세만 허용되면 귀국할 생각이었으므로 모든 언행을 신중히 취하려고 노력했으며, 특히 해외교포 중 동기가 불순한 자들에게 이용되지 않도록 나름대로 주의하고 노력했었음.

4. 본인은 이미 2대 원칙에서 말한 바와 대한민국의 국헌에 손상을 입히지 않도록 최대한 주의했으며 뿐만 아니라 박 대통령에 대해서도 유신헌법이란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실재성에 의한 합법적 정권이라는 점은 언제나 인정했음. 따라서 민주회복은 국민의 투쟁에 의해 유신헌법의 개정절차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했었음.

5. 이러한 신념에 따라 본인은 미국과 일본의 한민통을 수립할 때 우리 운동의 양대 원칙을 분명히 했으며 어디를 막론하고 본인이 책임질 수 있는 조직과 인원구성을 하려 했음. 따라서 그 사상이나 행동에 의심과 물의가 있는 자는 제외코자 작심해 사실 당초 미국 한민통의 의장감으로 생각했던 임창영 씨를 제명했던 것임.

그러나 본인이 납치된 후 일방적으로 민단 비주류에 의해서만 결성된 일본 한민통이 그 후 이유 여하를 불문하고 미군철수를 주장하며 친북인사들과 함께 한민통 회의를 개최하며, 또 우리 대법원으로부터 반국가단체로 규정된 것은 당초 그들과 일본 한민통 조직을 협의했던 본인으로서는 심히 유감 된 심정을 금할 수 없는 바임.

위의 진술은 사실과 다름없습니다.

1980년 5월 25일

진술인 김대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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