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동의 현대사 읽는 '현대사 자료실' 펜앤드마이크 홈페이지에 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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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초승인 2018.11.29 13:24:37
  • 최종수정 2018.11.30 2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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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사건 수사기록 등 생생한 현대사 자료 공개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검찰진술조서
김대중 전 대통령 1980년 5월 17일 체포 후 검찰에 제출한 자필 진술소 등 공개
김영삼·김대중의 비자금 은폐 위해 5·18 특별법 만들어 전두환·노태우 구속

팬앤드마이크(PenN)는 11월 29일 홈페이지에 새롭게 '현대사 자료실'을 개설하고, 우리 현대사를 새롭게 조망할 수 있는 현대사 관련 자료들을 공개한다. 우선 첫 기획으로 김영삼 정부 시절 제정된 5·18 특별법에 의해 진행되었던 ‘12·12 및 5·18 사건’ 검찰수사기록 중 중요내용을 차례로 공개할 예정이다.

김영삼 정부 시절 진행된 5·18 사건 수사기록에는 ▲전두환·노태우·최규하 전 대통령의 진술조서 ▲김대중 전 대통령이 1980년 5월 17일 체포된 직후 검찰에 제출한 자필 진술서 ▲1980년 당시 국무총리로서 신군부의 등장을 지켜보았던 신현확의 검찰 진술조서 ▲5·18사건 수사 과정에서 신군부를 유죄의 벼랑으로 몰아넣은 권정달, 주영복 당시 국방부장관의 진술조서 ▲이희성 당시 계엄사령관의 진술조서 김영삼·김대중·김종필 체포를 진두지휘했던 이학봉 당시 보안사 대공처장의 검찰 진술내용 등이 담겨 있다. 또 광주 현장에 출동했던 공수부대 현장지휘관들의 검찰 진술조서 등 생생한 내용들을 통해 광주의 실체를 접근하는 데 길잡이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이밖에도 팬앤드마이크 현대사 자료실에는 신현확의 현대사 증언록, 북한 공산정권 수립의 주인공이었던 소련 정치사령관 스티코프의 일기 등 그 동안 확보한 다양한 비자료들을 차례로 공개할 예정이다.

김영삼 대통령 지시로 5·18 특별법 탄생

원래 5·18 광주 문제는 노태우 정부 시절인 제13대 국회에서 1년 6개월에 걸쳐 ‘제5공화국에 있어서의 정치권력형 비리조사특별위원회(5공비리특위)’와 ‘5·18 광주민주화운동 진상조사특별위원회(광주특위)’ 연석청문회를 통해 사건의 실체를 가렸다.

또 노태우 대통령을 비롯하여 통일민주당의 김영삼 총재, 김대중, 김종필 등 야당 영수들의 합의에 의해 1989년 12월 31일 백담사로 유배를 가 있던 전두환 전 대통령이 국회에 출석하여 청문회에서 증언을 하는 것으로 정치적 종결을 선언한 바 있다.

당시 전두환 전 대통령은 “5·18 광주사건은 폭도들에 대한 불가피한 자위권 행사로 발포했다”고 증언하자 야당 의원들이 “살인마” 등 항의를 쏟아내 정회가 선포됐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정회 선언 직후 증인석에서 나와 몸을 돌렸을 때 당시 초선의원이었던 노무현 의원이 증언대를 향해 자신의 이름이 적힌 명패를 투척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무명의 초선의원 노무현은 이 사건으로 일약 스타덤에 올라 대통령까지 오르게 된다.

정치적으로 종결되었고, 검찰도 1년 2개월이라는 장기간의 수사 끝에 불기소처분을 했던 5·18 광주 문제를 또 다시 끌어내 한국 사회를 뒤틀어버린 인물은 김영삼이었다. 그는 대통령 재임 초만 해도 광주 문제와 관련하여 “역사의 심판에 맡기자”는 입장이었고, 5·18 특별법 제정 요구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견해를 밝혔다.

하지만 광주 지역의 피해자 및 야당과 재야인사, 대학생과 교수, 지식인들은 민간 차원에서 오래 전부터 광주 사건을 촉발시키고 시민들을 사망케 한 신군부 핵심세력들을 처벌해 달라면서 관련자들을 사법기관에 고소·고발 하는 등 법적 투쟁을 계속해 왔다. 검찰은 1995년 7월 18일,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면서 ‘공소권 없음’ 결정을 내렸다.

이렇게 되자 정동년 광주민중항쟁운동연합회장 등 ‘광주항쟁 진상규명 및 정신계승을 위한 국민위원회’ 소속 회원 322명이 헌법소원을 내는 등 격렬한 반대 투쟁을 벌였다.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등 종교단체는 국회에 특별법 입법 청원서를 제출했고, 대학생들이 시위에 나섰으며, 대학 교수들은 특별법 제정을 요구하며 서명운동을 벌였다.

사법기관의 판단에 이의를 제기하는 재야단체와 야당, 반정부 인사들의 항의와 시위가 이어지자 김영삼 대통령은 그 동안 “역사에 맡기자”는 입장을 뒤엎고 1995년 11월 24일, “특별법을 만들어서라도 5·18 사건을 재수사하라”고 지시했다. 이를 정권적 차원에서 대대적으로 선전하기 위해 ‘역사 바로 세우기’라는 용어까지 등장했다.

김영삼 대통령의 지시가 떨어지자 검찰은 즉각 ‘12·12 및 5·18 특별수사부’를 설치하고 전면 재수사에 착수, 노태우 전 대통령을 뇌물수수 혐의로, 이어 12월 3일에는 전두환 전 대통령을 12·12 군사반란 및 5·18과 관련하여 구속 수감했다. 12월 19일 국회에서 ‘5·18 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이하 5·18 특별법)’이 제정되었다.

5·18 특별법은 12·12와 5·18 주모자와 공범자의 공소시효를 정지시켜 내란 및 군사반란죄로 처벌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이 핵심이다. 이를 위해 1979년 12월 12일과 1980년 5월 18일을 전후해 발생한 헌정질서 파괴 범죄행위에 대해 1993년 2월 24일까지 공소시효 진행이 정지된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제2조).

법률 제정 과정에서 위헌 논란 제기돼

또 향후 반란죄, 내란죄와 집단학살 등 헌정질서 파괴범의 경우 공소시효를 영구히 배제하는 내용의 ‘헌정질서 파괴범죄의 공소시효 등에 관한 특례법’도 별도로 제정했다. 이와 함께 정부가 5·18 민주화운동 정신 계승을 위한 기념사업을 추진할 것(제5조) ‘5·18 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 등에 관한 법률’에 따른 보상을 배상(賠償)으로 볼 것(제6조), 5·18 민주화운동을 진압한 것을 공로로 받은 상훈에 대해서는 서훈을 취소하고 훈장을 환수할 것도 함께 규정하고 있다(제8조).

‘5·18 특별법’ 제정 과정에서 소급입법 불가 원칙을 위반한 위헌(違憲) 논란이 제기됐다. 헌법재판소는 5·18 특별법에 대한 공소시효 정지조항의 위헌 여부를 검토한 결과 김진우·이재화·조승형·정경식 재판관 등 4명은 합헌 의견, 김용준·고중석·김문희·황도연·신창언 재판관 등 5명은 위헌 의견을 냈다. 결국 “위헌 결정을 위해서는 재판관 6명의 찬성이 있어야 한다”고 규정한 헌법재판소법에 의거, 공소시효 조항이 합헌으로 결정됐다.

당시 판결 과정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5·18 특별법의 공소시효에 대한 표결 결과 헌법재판소 재판관 9명 중 합헌 4명, 위헌 5명으로 나타나 어느 쪽도 3분의 2(6명)를 충족시키자 못했다.

이 경우 위헌으로 폐기되는 것이 상식적 판단일 뿐만 아니라, 위헌으로 본 판사가 5명으로 합헌보다 1명이 많았는데도, 4명밖에 안 되는 합헌에 손을 든 판사들 의견대로 합헌 결정이 내려졌다. 따라서 엄밀하게 표현하면 5·18 특별법은 합헌 판결을 받은 것이 아니라 “위헌 결정을 받지 않은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법률가 출신인 유수호 의원(당시 자민련 소속, 유승민 의원의 부친)은 1995년 12월 19일, 국회에서 “5·18 특별법은 결론적으로 명백한 헌법 위반이다. 또한 이 나라 헌정질서를 파괴하는 법안이 명백하다. 그 이유는 5·18 특별법은 법률불소급의 원칙, 형벌불소급의 대원칙을 천명한 헌법규정에 정면으로 저촉되기 때문”에 ‘5·18 특별법’은 위헌이라고 통렬히 비판했다.

유 의원은 “헌법 위반이라고 주장하던 여당의 법률가 출신 의원들이 대통령의 말 한 마디에 위헌이 합헌으로 돌아갔다”면서 “김영삼 대통령의 말 한마다는 이 나라 헌법 위에 군림하고 있는 셈이니 초헌법”이라고 강력 비판했다.

여기서 한 가지 강력한 의문이 제기된다. 1995년 11월을 전후하여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김영삼 대통령은 위헌 논란을 무릅써가면서 특별법 제정을 지시했을까?

통일민주당을 이끌던 김영삼 총재는 전두환 전 대통령이 국회 청문회에 출석하여 증언을 한 지 두 달 후인 1990년 2월 9일, 민주정의당(노태우), 신민주공화당(김종필)과 3당 합당했다. 그 결과 1990년 민주자유당이 창당되었고, 1992년 이 당의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여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민자당은 이후 계파 간 당권 경쟁으로 갈등이 첨예화하기 시작한다. 급기야 1995년 2월 9일, 3당 합당의 한 축이었던 김종필 대표최고위원이 탈당하여 4월 3일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하면서 기둥 하나가 무너져버렸다.

김영삼·김대중 비자금 사건을 덮기 위해…

민자당은 1995년 6월 27일 지방선거에서 참패하면서 대구·경북 지역을 중심으로 반(反)김영삼 기류가 형성되었다. 일부 민정계 인사들이 탈당하자 김영삼은 민주계를 중심으로 당명을 신한국당으로 변경하면서 3당 합당은 파탄이 났다.

이 와중인 1995년 8월 1일, 김영삼 대통령의 측근인 서석재 당시 총무처 장관이 사석에서 노태우 전 대통령이 4000억 원의 비자금을 시중은행에 비밀 예치했다는 발언을 했다. 이 내용이 언론에 보도되어 파문이 일자 김 대통령은 서 장관의 발언을 일종의 해프닝으로 간주하여 그를 해임하는 것을 사건을 마무리했다.

그런데 10월 19일 박계동 의원이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노태우 전 대통령이 4000억 원의 비자금을 시중은행에 예치했다”고 폭로하여 정치권이 발칵 뒤집혔다. 박 의원의 폭로가 터진 지 9일 후인 10월 27일, 노태우는 “재임 중 5000여억 원의 통치자금을 조성했고, 남은 돈은 1700여억 원”이라고 비자금 조성사실을 시인하고 대국민 사과를 했다.

그런데 전직 대통령이 사과하고 비자금 조성자인 이원조 의원이 책임을 지는 선에서 미봉하려 했던 비자금 사태는 엉뚱한 곳에서 폭발했다. 노태우의 대국민 사과가 시작되기 직전, 중국을 순방 중이던 김대중 새정치국민회의 총재가 급거 귀국하여 “14대 대선 당시 노태우에게 20억 원의 비자금을 받았다”고 실토한 것이다.

김대중이 노태우로부터 20억 원의 자금을 받은 사실은 김대중의 정치생명을 끝장낼 수도 있는 메가톤 급 사건이었다. 만약 검찰이 노태우 비자금 향방을 추적하면 김대중이 노태우로부터 받은 비자금 전모가 드러나게 될 것이니, 김대중 총재는 미리 이 사실을 밝히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이날 김대중은 “20억 원 이외에는 노 씨로부터 어떤 정치자금도 받은 일이 없으며, 김영삼 대통령과 관련한 점에 대해서도 명백히 밝혀야 할 것”이라고 발언했다. 위기 탈출을 위해 김영삼 대통령을 물고 늘어진 것이다.  이 발언은 “내가 노태우로부터 20억 원을 받았으니 노태우 아래서 대통령이 된 김영삼 당신은 더 엄청난 비자금을 받았을 것 아닌가. 조사하면 당신도 무사하지 못할 터이니 알아서 막아라”라는 신호였다.

김대중이 김영삼 대통령의 대선자금 문제를 걸고 넘어지자 민자당 사무총장 강삼재는 “김대중이 더 많은 액수를 받았다”면서 이른바 ‘20억+알파(α)설’을 터뜨렸다. 벼랑 끝에 몰린 김대중은 “김영삼은 노태우 자금을 받아 선거를 치른 공범”이라고 공격하면서 노태우 비자금 문제는 현직 대통령 김영삼 쪽으로 불똥이 튀었다.

노태우 비자금을 성역 없이 추적하면 김영삼 대선자금은 물론 김대중이 노태우로부터 받았다는 ‘20억+알파’의 진상이 백일하에 드러나게 될 위기에 처하자 김영삼은 여론의 물꼬를 다른 쪽으로 틀기 위한 핵폭탄 급 이슈가 필요했다. 그것이 바로 ‘5·18 특별법’이었다.

5·18 특별법으로 노태우와 전두환을 ‘반란 수괴’로 몰아 구속시키고, 정국을 일거에 전직 대통령 구속 사건으로 뒤집기를 함으로써 김영삼은 자신과 김대중을 옭죄어 오던 대선자금의 연결고리를 차단하는 데 성공했다. 김대중도 호남 지역 주민들의 숙원이던 ‘5·18 특별법’을 간단히 해결하는 데 조연 역할을 함으로써 ‘20억+알파’ 발언으로 추락했던 명예를 회복할 수 있게 되었다.

대한민국을 과거사의 수렁으로 몰아넣은 김영삼의 ‘5·18 특별법’은 ‘양김’으로 상징되는 김영삼과 김대중이 노태우 비자금의 수렁에서 탈출하기 위해 기획된 고도의 정치적 작품이었다. 이로써 김영삼과 김대중은 정치적 영생을 누리는 데 성공했지만, 대한민국은 ‘5·18 국가유공자 양산 문제, 과거에 발목 잡혀 미래를 잃어버리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검찰은 ‘5·18 특별법’을 통해 수사를 하는 과정에서 총 14만 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수사기록을 남겼고, 그 중 9만 페이지 정도를 공개했다. 팬앤드마이크는 수사기록 중 의미 있는 내용들을 차례로 공개할 것이다.

김용삼 대기자 dragon0033@pennmik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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