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en.wikipedia.org/wiki/Third_Partition_of_Poland#/media/File:Partitions_of_Poland.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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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폴란드 분할의 시기 (서기 1764년 - 서기 1795년)

1764년 폴란드 귀족들은 러시아 여제 예카테리나 2세의 압력을 이기지 못 하고 그녀의 옛 연인 스타니스와프 아우구스트 포니아토프스키 (Stanislaw August Poniatowski)를 국왕으로 선출했다. 포니아토프스키는 개인적 자질이 매우 뛰어났지만 러시아에 맞서 싸울 때마다 옛 연인의 호의를 기대하며 우유부단한 태도를 보였다.

폴란드가 사실상 러시아의 영향권 하에 들어가자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는 예카테리나 2세에게 폴란드의 분할을 제의했고 이 소식을 들은 오스트리아의 여제 마리아 테레지아 - 프랑스 혁명 당시 처형당한 프랑스 왕비 마리 앙트와네트의 모친 - 도 폴란드 분할에 참여하기로 결심했다. 1772년 러시아, 오스트리아, 프로이센의 통치자들은 러시아의 수도 페테르부르크에 모여 폴란드 영토를 분할하는 조약에 서명하였다.

과거 폴란드의 도움으로 오스만 투르크 제국으로부터 수도 빈을 지킬 수 있었던 오스트리아의 통치자 마리아 테레지아는 폴란드 분할과 관련하여 국내외의 맹비난을 받았다. 프리드리히 2세는 "마리아 테레지아는 눈물을 펑펑 쏟아내며 폴란드의 분할에서 얻을 수 있는 이익은 모두 얻으려고 노력했다"고 논평하였다.

같은 해 러시아는 폴란드의 동부 지역을 오스트리아는 폴란드 남부 지역을 프로이센은 독일 내의 영토인 브란덴부르크 변경백령과 프로이센 공국 사이의 폴란드 해안 지역을 각각 점령한 후 폴란드 하원의장 아담 포니인스키 (Adam Poninski)를 매수하여 해당 지역을 양도하는 내용의 조약안이 폴란드 의회에서 승인되도록 하였다. 이제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2세는 대외적으로도 자신의 직위를 King in Prussia가 아닌 King of Prussia라고 표기하기 시작했다. (제1차 폴란드 분할)

충격에 빠진 폴란드인들은 민족부흥운동을 시작하여 1788년 바르샤바에서 폴란드군 병력을 10만명으로 늘리고 1791년 5월 3일에는 전세계에서 두번째로 성문 헌법을 제정하였다. 이 헌법의 주요 내용은 폴란드 만장일치제의 기반이 되었던 귀족들의 거부권, 리베룸 베토 (Liberum Veto)를 폐지하고 선거제 왕위를 세습제로 변경하는 것이었다.

1792년 러시아를 두려워 하던 일부 폴란드 귀족들이 5.3 헌법을 폐지할 것을 주장하는 타르고비차 동맹 (Konfederacja targowicka)을 결성하자 이에 호응하여 러시아 군대가 폴란드로 진격해 들어오면서 전쟁이 발발했다. 폴란드 군대는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러시아군을 여러 차례 격파하였으나 국왕 포니아토프스키는 폴란드가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예카테리나 2세와 정전에 합의하였다. 포니아토프스키는 이 한번의 실수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의 멸망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셈이다.

그러나 예카테리나 2세는 옛 연인에게 호의를 베풀 생각이 전혀 없었다. 1793년 러시아는 민스크 등 벨라루스 지역을 프로이센은 비엘코폴스카 지역을 차지하며 폴란드는 이제 망국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오스트리아는 프랑스 국왕 루이 16세와 왕비 마리 앙트와네트의 처형 등 프랑스 혁명에 따른 급변사태에 대비하느라 폴란드 영토의 분할에 참여하지 못 했다. (제2차 폴란드 분할)

폴란드인들은 무력 투쟁을 통하여 국가를 수호해야 한다고 믿고 1794년 미국 독립전쟁과 폴란드 - 러시아 전쟁의 영웅 타데우시 코시치우쉬코 (Andrzej Tadeusz Bonawentura Kościuszko)를 지도자로 선출한 후 대대적으로 의용군을 모집하였다. 이들은 러시아군에게 여러 차례 승리를 거두었으나 비정규군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 하여 결국 패배하였다.

1795년 러시아는 빌뉴스를 오스트리아는 크라쿠프를 프로이센은 바르샤바를 차지하면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은 지도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폴란드 국왕 포니아토프스키는 옛 연인 예카테리나 2세에 의하여 강제로 퇴위된 후 러시아의 수도 페테르부르크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1798년 사망했다. (제3차 폴란드 분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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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는 수많은 전투를 통하여 유럽의 역사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고도 자신은 주인공으로 기록되지 못한 세계사라는 무대의 가장 중요한 조연 배우들 중의 하나이다.

폴란드인들은 960년 체코에서 카톨릭을 받아들이고 972년 체디니아 (Cedynia)에서 이교도 정복을 명분으로 침략해 온 독일군을 격파하여 게르만족의 슬라브족 정복을 막아냈다. 이들이 아니었다면 게르만 민족의 거주지역은 현재의 러시아 영토까지 확대되었을 것이다.

1241년에는 몽골 제국의 침략에 맞서 싸우다가 크게 패배했지만 몽골인들에게 유럽은 약탈할 자원은 별로 없는데 사람들은 매우 거칠다는 인식을 주어 기독교 세계를 보존하는데 기여했다.

1610년에는 러시아 내전에 개입하여 크우쉰 (Kluszyn)에서 러시아군을 격파하고 모스크바를 점령한 후 러시아인들에게 카톨릭 신앙을 강요하다가 미하일 로마노프가 주도하던 반란군에게 축출되면서 로마노프 가문이 지배하는 러시아 제국의 성립을 가져오게 된다.

1683년에는 폴란드 국왕이 카톨릭 연합군의 총사령관을 맡아서 오스트리아 빈을 포위하고 있던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군대를 격파하고 유럽의 기독교 세계를 이슬람의 위협에서 구출한다.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는 점은 이렇게 폴란드인들이 피를 흘리면서 구해 주었던 오스트리아가 불과 100년 후에 프로이센 및 러시아와 함께 폴란드를 분할하여 자신들의 영토에 편입시킨다는 사실이다. 다만 오스트리아는 독일어 및 러시아어 사용을 강요하던 프로이센이나 러시아와 달리 폴란드어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게 하는 등 폴란드 문화를 존중해 주었다.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은 1772년, 1793년, 1795년의 폴란드 영토 분할에 몰두한 나머지 1789년에 발생한 프랑스 혁명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 하여 1814년까지 나폴레옹에 의하여 실질적 지배를 받는 처지가 된다. 이 기간 중 폴란드는 나폴레옹의 패권 하에 바르샤바 공국이라는 이름으로 잠시 독립국의 지위를 누린다.

만약 폴란드가 18세기에도 계속 강대국으로 남아있었다면 프랑스 혁명 세력들이 자국 내 카톨릭 교회의 재산을 몰수했다는 이유로 프랑스 파리가 폴란드 국왕 주도 하의 카톨릭 연합군에 의하여 점령되었을 것이다. 과거 게르만 민족의 동진과 이슬람 세력의 북진을 저지했던 열렬한 카톨릭 국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이 멸망하지 않았더라면 로마 교황청의 요청에 의하여 프랑스 혁명 세력을 진압하려고 하였을 것이 분명하다.

1920년에는 바르샤바에서 폴란드군이 소련군을 격파하여 공산주의자들의 서유럽 진출을 저지하였다. (비스와강의 기적) 폴란드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공산화되어 소련의 위성국으로 전락하였지만 폴란드인들은 결국 공산주의 종식에 크게 기여하게 된다. 1978년 로마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로 선출된 폴란드인 카롤 보이티와 (Karol Józef Wojtyła)는 1981년 폴란드 자유노조 지도자 레흐 바웬사 (Lech Wałęsa)와 함께 소련의 몰락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자유를 중시하는 폴란드인들은 대의를 위하여 헌신하는 미덕을 가지고 있으며 그에 따른 많은 희생을 감수하는 - 하지만 자신들의 이익 추구에는 서투른 - 인간미 넘치는 사람들이다. 16세기 지동설을 통하여 중세의 우주관을 폐기시킨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 19세기 최고의 피아노곡 작곡가 "피아노의 시인" 프레드릭 쇼팽, 20세기 초 라듐을 발견하고 방사선을 연구했던 노벨 물리학상 및 노벨 화학상 수상자 마리 퀴리 등은 이러한 폴란드인들의 기질을 대표하는 인물들이다.

마지막으로 16세기까지 동유럽의 패권국이었던 폴란드가 왜 독일과 러시아에게 강대국의 지위를 빼앗기게 되었는가에 대하여 생각해 보아야 한다. 우선 귀족들의 선거로 선출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의 국왕들이 국외에도 영토를 가지고 있는 경우 자신의 세습령의 이익을 우선시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여기에 더하여 일부 폴란드 귀족들은 만장일치제를 활용하여 자신에게 불리한 개혁에는 무조건 반대하는 방식으로 폴란드 발전을 크게 저해했다.

귀족들의 자유와 권리를 중시하던 만장일치제의 나라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이 주변 절대왕정 국가들의 공세를 이겨내지 못 하고 멸망했던 역사적 기록은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민주주의 (民主主義)를 이성적으로 이해하지 못 하고 종교처럼 맹신하면서 국가 전체가 쇠퇴의 길로 가고 있지 않느냐고 묻고 있다. 어쩌면 21세기 대한민국은 민주주의를 신처럼 모시면서 과거 조선왕조가 왕도정치 (王道政治) 이념에 집착하다가 몰락했던 것과 동일한 경로를 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유태선 시민기자 (개인사업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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