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 대한민국역사박물관 현장취재(上)
경부고속도로 포항제철 건설 등의 기록에 박정희 이름 통째로 빠져
긍정적인 내용에서 '박정희'는 지운 반면 전태일은 전용 영상 있어 대조적

서울 광화문에 있는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은 1919년 임시정부 수립부터 현재까지의 대한민국 역사를 전시하는 곳이다. 과연 박물관은 우리나라 현대 역사를 올바르게 전시하고 있을까? 기자는 이런 소박한 문제의식에 입각해 최근 역사박물관을 두번 방문해 취재했다. 아직 박물관을 찾지 못한 분들을 위해 박물관에 전시된 주요 내용들을 공개한다.

세계가 찬탄하는 한국의 경제기적 역사는 소개하고 있었지만 국가지도자로서 '불가능의 기적'을 이끌어낸 주역인 박정희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독립운동을 소개하는 전시물에는 해방 직후 좌익 진영도 '독립운동의 지도자'로 인정했던 이승만에 대한 내용은 통째로 빠져 있었다. 그리고 '촛불'은 찬란하게 빛났다.

오늘은 첫번째 스포일러(핵심내용 발설)를 소개하겠다. ‘대한민국 성장과 발전’을 다룬 3전시관으로 들어가보자.

3전시관은 1961년부터 1987년까지의 사건들을 다루고있다. 그러나 실제로 ‘대한민국 성장과 발전’에 대한 내용은 1961년 박정희 정부의 출현에서 시작해 1979년 박정희 대통령 서거를 다루면서 끝난다. 전시관의 70%가 박정희 정부 18년간의 사건들이다. 그 이후는 이른바 '광장'에 대한 얘기다.

박정희 18년간의 경제발전을 조명하기에 그의 치적이 어떻게 다루어지고 있는지 궁금했다.

 

경부고속도로 개통
경부고속도로 개통식(박정희 대통령 등이 테이프커팅을 하는 사진 대신 텅 빈 고속도로 사진을 소개하고 있다.)

 

경부고속도로 건설 설명
경부고속도로 건설 설명

 

“국내 언론이나 세계은행은 건설 계획에 부정적이었지만, 정부는 연인원 892만 8000명에 달하는 건설 인력을 투입하여 그들의 피와 땀, 끈기로 매우 짧은 기간에 저렴한 비용으로 공사를 마쳤다.”

박물관은 노동자들이 경부고속도로 건설의 주역이라고 다루고 있다. 실제 그들이 건설을 했으니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경부고속도로 건설 설명
경부고속도로 건설 설명

 

그러나 당시 야당과 언론, 해외 연구기관들의 부정적 시선과 비판에도 불구하고 앞날에 대한 혜안으로 경부고속도로라는 민족사적 대역사(大役事)를 결심하고 관철시킨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내용은 전혀 없다.

경부고속도로 뿐만 아니라 박정희 시대를 다룬 거의 모든 항목에서 긍정적인 부분은 '박정희' 대신 '당시 정부'란 표현을 쓴 반면 부정적인 내용은 '박정희 정권'이라고 '박정희'를 부각해 명기한 부분도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새마을 운동 설명 영상
'새마을 운동' 설명 영상

 

‘새마을 운동’에 관해 약 3분간 설명하는 영상이다. 전세계에 수출된 자랑스런 새마을 운동 정신을 다루고 있다. 영상에서는 새마을 운동이 국민 스스로의 자각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박정희 대통령의 사진이나 영상은 나오지 않는다. 다만 그가 작곡한 ‘새마을 노래’는 배경음악으로 흐른다.

 

종합제철소 건설 설명
종합제철소 건설 설명

 

“1960년대에 정부는 철강재를 자급하기 위해 종합 제철소 건설을 추진하였다. 하지만 외자 조달 문제 때문에 1962년의 건설계획이 취소된 데 이어 1965~1969년의 제철소 건립 시도도 무산되는 듯하였다.

이에 정부는 한일 국교 정상화에 따른 대일 청구권 자금을 전용하고 일본 제철업계의 기술 협조를 받아, 1970년 포항에 종합 제철소 건설 공사를 시작하여 3년여 만에 준공하였다. 그 후 한국의 철강 산업은 지속적인 투자와 연구개발로 세계 수준의 경쟁력을 갖추었고, 건설, 조선, 자동차, 전자 산업의 발달에 큰 역할을 하였다.”

역시 포항제철 건설을 결심한 박정희와 그와 손잡고 '영일만의 기적'을 만들어낸 박태준에 대한 언급은 없다. 대일 청구권 자금을 ‘전용’해서 철강산업을 키웠고 경제발전에 큰 역할을 했다는 내용은 담겨있다. 박물관은 왜 대일 청구권 자금을 ‘전용’했다는 표현을 굳이 쓴 것일까?

 

한일회담 설명
한일회담 설명

 

“…박정희 정권은 경제개발에 일본의 협력을 얻기 위해 회담의 타결을 서둘렀다. 그 결과 식민 지배에 대한 일본의 불충분한 사과 등의 문제가 남게 되었다. 야당과 대학가에서는 한일 회담을 굴욕 매국 외교라 하여 강하게 반발하였고, 이 과정에서 박정희 정권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었다."

 

한일회담 설명
한일회담 설명 (시위하는 학생들이 눈에 띈다)

 

박물관은 한일회담이 ‘굴욕 매국 외교’라는 평가를 받았었다며 비판적으로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한일회담을 설명할 때는 ‘박정희’의 이름 세글자가 나온다.

박물관은 박정희 18년의 업적을 균형 있게 다룬다는 명분으로 ‘성장의 그늘’도 함께 조명한다.

 

성장의 그늘
성장의 그늘

 

“고도성장의 이면에는 그늘도 짙었다. 농업과 공업 간, 도시와 농촌 간, 지역 간격차가 커졌다…또 수출 산업의 경쟁력 확보에 주력하다 보니 근로자들의 권익은 무시되었다…평화시장 재단사 전태일은 1970년 11월 13일에 평화시장 앞에서 근로 기준법 준수를 요구하며 분신자살로 항의하였다. 이는 노동 문제의 심각성을 사회에 알린 계기가 되었다. 그렇지만 정부는 성장 위주의 정책을 유지하였다.”

 

전태일 추모 영상
전태일 추모 영상

 

박정희 대통령의 사진이나 영상은 ‘대한민국 성장과 발전’을 다룬 전시실에 보이지 않지만, 정치세력에게 이용·희생당한 전태일은 전용 영상이 나온다.

대통령이 추진했던 자주국방사업, 널리 알려진 수출산업훈장에서도 박정희의 사진과 이름석자는 나오지 않는다. 박정희 대통령의 얼굴은 조그만 신문기사들을 통해 전시관에서 총 세번 나온다.

 

박정희 신문사진 (중화학 공업 입국)
신문에 나온 박정희 (중화학 공업 입국)

 

박정희 신문사진 (긴급조치)
신문에 나온 박정희 (긴급조치)

 

박정희 신문사진 (사망)
신문에 나온 박정희 (사망)

 

사망기사에 나온 사진이 가장 사이즈가 컸다. 그 다음이 긴급조치였다. 중화학공업입국 기사에 나온 사진은 작아서 잘 보이지 않는다.

 

'성장을 일궈낸 국민들의 피와 땀' 벽면
'성장을 일궈낸 국민들의 피와 땀' 벽면

 

국민은 있었지만 박정희는 없었다. 역사속의 그의 존재를 모두가 인식하는데, 모두가 애써 외면하는 것 같았다.

기우였을 수도 있다. 박물관에서 특정 인물을 조명하지 않으려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1987 박종철 추모관
1987 박종철 추모관

 

한국역사박물관의 현재 관장은 '토지공개념' 공론화를 이끌었고, 참여연대의 참여사회연구소 초대 이사장을 지낸 주종환씨의 아들 주진오 상명대 역사콘텐츠학과 교수다. 

국내 사학계의 대표적인 좌파 성향 학자 중의 한 명으로 알려진 주 교수는 문재인 정권 출범 후인 작년 11월 역사박물관장으로 취임했다.

김민찬 기자 mkim@pennmik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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