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동근 칼럼] 협력적 이윤공유제와 『유토피아』 바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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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초승인 2018.11.25 13:33:43
  • 최종수정 2018.11.26 17:43
  • 댓글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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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를 오독하면 '평등지상주의'에 빠질 수 있어
저자 토마스 모어는 '평등' 그 자체가 목적인 유토피아를 부정
평등을 '이상향'으로 삼는 것이 한국사회를 지나치게 경도시켜
조동근 칼럼니스트

중소벤처기업부가 ‘협력이윤배분제’를 법제화하겠다고 팔을 걷어붙이고 있다. 사적(私的) 이익을 나누라는 것은 자본주의 시장 원리를 부정하는 제도라는 게 재계의 일반적 시각이다. 하지만 정부 입장은 단호하다. 우선 제도도입이 급작스러운 게 아니라는 것이다. 지난해 7월 발표된 문재인 정부의 100대 국정과제에 협력이익배분제가 포함되었고 올 초 중소벤처기업부 업무보고에서 협력이익배분제 법제화를 예고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대·중소기업 양극화를 시정하는 노력을 지금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될 만큼 상황이 급박하다는 것이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매출액영업이익률 격차는 2015년 1.1%에서 2016년에는 2.1%로 확대되었으며 중소기업의 임금이 대기업의 절반 수준이라는 것이 이익배분제 도입주장의 논거다.

O 협력이윤공유제 착상 동기에 대한 유추

정부는 ‘어떤 동기에서’ 이런 반(反)시장적 규제를 착상하였을까? 2가지 유추가 가능하다. 하나는 '대기업의 그늘에 가려 중소기업의 성과가 낮지 않았을까'라는 의구심이다. 대기업의 협력업체에 대한 착취가 구조화되었다는 예단(豫斷)이다. 대기업 이익의 일정 부분은 중소협력업체의 것이니 이를 돌려줘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이익을 공유하는 것은 생산자원을 공유하는 것으로, 공동체 중심의 ‘평등사회’에 대한 향수가 그 저변에 깔려있는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그렇다면 협력이윤배분제는 단순한 제도 변경이 아닌 ‘사회변혁운동 차원’에서 추진하려는 것이 아닌가 유추된다.

철학자 허버트 마르쿠제(Herbert Marcuse)는 그의 저서 <일차원적인 인간>을 통해 고도산업사회에서 인간의 사상과 행동이 체제 안에 완전히 내재화하여 ‘변혁력(變革力)’을 상실하였다고 비판하고 있다. 그는 “정의가 실현되지 않은 사회에서는 정의를 실현하려는 모든 노력이 마치 ‘공상적’인 것처럼 보이게 된다”는 것이다. 불의와 불공정, 거짓과 기만이 일상화되어 있는 사회일수록, 그 사회를 변화시키려는 시도를 유토피아적이고 망상적인 노력이라고 폄훼한다는 것이다. 그는 신좌익운동의 정신적 지주이다.

정의는 좌파의 전유물이다시피하다. 만약 협력이윤공유제를 정의를 실현하는 하나의 수단으로 여긴다면, 동의하기 어렵다. 이분법으로 세상을 재단해 대중의 분노를 일으키고 이를 사회변혁의 동력으로 삼는 좌파 특유의 전략적 접근일 수 있다. 아니면 공동체 중심의 평등사회를 지향하는 토마스 모어(T. More)의 ‘유토피아’를 향한 첫 걸음일 수도 있다. 필자는 <유토피아>가 한국의 지식시장에서 과연 제대로 읽히고 해석되고 있는지 질문을 제기한다. 오독(誤讀) 된 나머지 이 같은 사고에 이르게 된 것은 아닌지를 성찰할 필요가 있다.

O 토마스 모어(T. More)의 <유토피아>

<유토피아>의 원제는 <공화국의 최선의 상태와 새로운 섬 유토피아에 대하여 (1516)>이다. 당시 영국의 문제점을 비판하고 극복하기 위한 도전으로 ‘유토피아’를 소개하고 있다. <유토피아>는 지주들이 양치기를 위해 농민들을 내쫒는 ‘인클로저’(enclosure) 운동을 사회적 배경으로 저술되었다.

당시 16세기 유럽은 중세 말의 위기를 거쳐 근대가 시작되는 급변기였다. 14~15세기는 전쟁과 질병 그리고 기근이 극에 달했던 시기였다. 특히 영국은 1453년까지 백년전쟁이 지속되었고 1455년부터는 30년 동안 다시 장미전쟁이 일어났다. 1485년 튜더 왕조가 시작되면서 기나긴 내전이 종식되고 회복과 성장의 단계로 들어갔으며 그 후 1509년에 헨리 8세가 즉위해 근대적 발전을 추동하기 시작했다. 국가적으로는 발전의 토대를 마련한 시기였지만 서민들은 여전히 고통스런 삶을 이어갔다. 가장 큰 사회적 문제는 ‘인클로저’(enclosure) 현상이었다. 직물업이 발전하면서 양모(羊毛) 수요가 급증하자 농민을 내쫓고 양을 사육했다. 농민들은 도시 빈민으로 전락했으면 범죄가 급증했다.

유토피아의 한 구절이다. “양들은 언제나 온순하고 아주 적게 먹는 동물이다. 그런데 이제는 양들이 욕심 많고 난폭해져서 사람들까지 잡아먹는다고 들었다. 양들은 논과 집 그리고 마을까지 황폐화시켜 버렸다.”

토마스 모어는 도시빈민의 비극적인 삶을 보면서 <유토피아> 저술을 결심한다. 플라톤의 <국가>는 그리스 전통에서 유토피아의 틀을 잡은 것으로 평가된다. 모어의 <유토피아>는 플라톤의 <국가>에 비견된다. 마르크스는 이 책을 사회주의에 대한 ‘이론적 선언’으로 높게 평가했다. 1516년 <유토피아>가 출간되고 그 다음해 종교개혁(1517)이 발발해, 종교개혁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평가된다.

<유토피아>는 2부로 구성된다. 1부에서는 인클로저 등 영국의 비참한 사회현실을 비판하고 2부에선 이상적인 사회질서를 유토피아라는 가상 섬을 통해 설명하고 있다. 유토피아는 ‘지혜의 여신’이 통치하는 나라를 은유한다. 토마스 모어는 ‘라파엘 히슬로다에우스(Hythlodaeus)’와 ‘모어(More)’라는 가상 인물의 논쟁으로 <유토피아>의 이야기를 끌고 간다. 하지만 그는 어떤 인물이 자신의 입장을 대변하는 지 설명하지 않는다. 독자의 판단에 맡기는 것이다. 하지만 당시 정치적·사상적 소용돌이 속에서 ‘자신을 보호하려는 지혜’일 수도 있다.

O 사회정의를 가로막는 근본 원인

사회변혁을 주장하는 히슬로다에우스의 논리는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사유재산이 존재하는 한 그리고 돈이 모든 것의 척도로 남아있는 한 어떤 나라든 정의롭고 행복하게 통치할 수 없다. 우리 삶에서 가장 좋은 것들이 최악의 시민들 수중에 남아있는 한 정의는 불가능하다. 재산이 소수의 사람들에게 한정되어 있는 한 누구도 행복할 수 없다. 재산을 가진 소수는 불안해하고 그렇지 않은 다수는 비참한 삶을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는 이를 해결할 수 있는 처방을 내놓는다. “현실의 비참한 상황이 전개된 직접적 원인은 ‘인간의 탐욕’ 때문인데 탐욕은 결국 사유재산과 화폐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화폐와 사유재산을 없애고 노동을 사회적 책무로 부과하면 무위도식이 없어지고 질투도 없어져 모두 덕(德)을 숭상하면서 풍요롭게 살 수 있다.”

하지만 모어는 정색을 하고 반대의견을 낸다. “모든 것을 공유하는 곳에서는 사람들이 잘 살 수 없다. 이익을 얻을 희망이 없으면 자극을 받지 못한다. 모든 사람들이 일을 안 하려고 할 텐데 어떻게 물자가 풍부할 수 있겠는가. 모두가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려하고 게을러질 것이다. 열심히 일해 얻은 것을 합법적으로 보장받지 못하면 그리고 통치자들에 대한 존경과 그들의 권위가 사라진다면 유혈과 혼란 밖에 더 남겠는 가. 모든 면에서 사람들이 평등하다면 어떻게 권위가 만들어질지 모르겠다.”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대변자인 듯한 두 사람의 논쟁으로 1부가 끝난다.

O 유토피아의 삶을 그린 2부

이상 국가는 인구를 99%와 나머지 1%로 나눈다. 전자는 노동자 그룹이고 후자는 ‘관리와 사제 그리고 학자’ 그룹이다. 이들 1%는 노동을 면제 받는 대신 누구나 열심히 생업에 종사하도록 관리 감독하는 일을 맡는다. 유토피아 세계에서의 노동은 현실의 노동과 다르다. 하루 6시간 일하고 나머지는 자유로운 생활이 보장된다. 기생적인 소비계층이 없기 때문에 적게 일하면서도 모든 사람이 풍요로운 삶을 누릴 수 있다. 사유재산과 화폐가 없기 때문에 필요한 부분만 소비하고 나머지는 ‘공동창고’에 저장한다. 쓸데없이 욕심내서 재산을 축적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마음이 평화롭다. 시민들이 순번으로 관리직책을 맡아 특권계급이 존재하지 않는다. 사적소유 및 화폐 소멸로 사회문제의 근본 원인인 오만과 탐욕이 사라진다. 사유재산을 반대하는 것은 불평등한 분배만은 아니다. 사유재산이 잉여생산에 대한 욕망을 일으켜 여유로운 행복을 뺏어가기 때문이다.

모어는 집단주의와 전체주의에 대해 명백한 반대의사를 표한다. 유토피아의 가장 큰 문제점은 ‘공동체 생활과 화폐 없는 경제’이다. 화폐가 없다는 것만으로도 국가의 진정한 영광으로 여기는 장엄함, 화려함, 장대함 등이 사라질 것이라고 주장한다. 화폐의 기능을 ‘이론적으로’ 설명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화폐를 매개로한 교환경제 즉 시장경제를 지지했던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공공도덕과 공동선이 사유재산과 배치된다고 볼 수 없다고 주장한다. “풍부한 재산이 덕의 고양에 중요한 수단이 될 수도 있다. 오히려 공동소유가 사람을 나태하게 만들 수 있다”. 그는 “유토피아는 실현가능성이 거의 없지만 제도 중에 도입할 만한 것이 여럿 있다”고 하면서 2부를 마친다. 절충을 꾀한 것이다.

극중 인물 중 “누가 저자 토마스 모어를 대변하는 지”가 관건이지만 이를 밝히지 않는다. 하지만 토마스 모어는 간접적으로 시사한다. 극중 인물 히슬로다에우는 ‘Hythlos(넌센스)와 daien(나눠주다)’의 합성어로, ‘허튼소리를 퍼트리는 사람’을 의미한다. 토마스 모어는 은유적으로 히슬로의 논리에 반대를 표하고 있다. 이를 간파하지 못한 평등론자들이 <유토피아>를 그들의 이념적 지지대로 삼고 있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유토피아>를 오독하면 ‘평등지상주의’의 함정에 빠질 위험이 높다.

O 에필로그

기업의 사적 성과인 이윤을 왜 공유해야 하는가. 대기업이 잘되어 중소기업이 아사(餓死)지경으로 몰렸는가. 대기업의 시장 ‘인클로저 운동’으로 중소기업이 변방으로 내 쫓기었는가. 동의하기 어렵다. 중소기업의 낮은 경제성과가 대기업의 횡포와 전횡에서 비롯된 것임을 ‘인과관계’로 설명할 수 없다면 이익공유제는 해법이 될 수 없다.

협력이윤공유제가 작동하려면 이윤을 어떤 기준으로 어떻게 나눌 것인가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대기업마다 수많은 협력업체의 매출 및 영업이익 기여도를 측정해 이익을 배분한다는 발상 자체가 언어도단이다. 이것이 가능하다면 바로 ‘사회주의 경제’로 이행하는 것이 최선일 것이다. 사회주의가 몰락한 이유 중의 하나는 ‘국가의 계산능력’을 과대평가했기 때문이다. 국가에는 이해상충을 해결해 줄 지식과 능력이 없다. 자유계약에 의한 즉 시장을 통한 이해조정이 최선이 길이다.

성과공유와 이익공유는 전혀 다른 개념이다. 합리적, 협력적 등 어떤 이름을 갖다 붙이더라도 매출과 이윤은 ‘공유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중소협력업체가 위기 상황이라면 그들의 경쟁력을 제고시킬 수 있는 다른 방안을 찾는 것이 정도일 것이다. ‘사적자치’로서의 성과공유가 아닌 ‘국가가 주도해서 이윤을 공유하는 문명국가’가 있다면 말해 보라.

국가는 모든 사람과 계층에 자애로운 ‘박애주의 실천자’가 될 수 없다. 한 손으로 빼앗고 다른 손으로 나누어준다면 모두들 국가만 쳐다 볼 것이다. 그것만큼 인간의 존엄을 해치는 것은 없다. 자본주의는 자기책임 원칙에 기초해 운영되는 체제이다. 자기책임 원칙을 인정해야 비로소 ‘사회안전망과 패자부활전’이 의미를 가진다. 한국사회의 지나친 평등주의에의 경도는 ‘평등’을 이상향으로 그린 저술을 오독해서 일수도 있다. 평등은 인류가 지향해야 하는 가치임에는 틀림없으나 평등이 ‘이상향’일 수는 없다. 사후적 평등, 결과의 평등은 더 말할 이유도 없다.

조동근 객원 칼럼니스트 (명지대 경제학과 명예교수 겸 바른사회시민회의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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