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3일은 종각역에서 열린 자유아카데미 첫 번째 수업이 시작된 날이다. 큰 생각 없이 그냥 한 번 들러나 볼까하는 마음으로 갔던 것이 벌써 두 번째다. 다녀온 소감을 말하자면 그 동안 이승만, 박정희 대통령을 덮은 온갖 죄악을 걷어내지 못해 은근슬쩍 피해 다닌 지난날이 너무나 죄송할 정도였다. ‘자유’라는 가치를 위해 영웅이 아닌 역적이 되어도 좋다는 두 영웅의 숭고한 진심을 마침내 조금 이나마 이해했기 때문이다. 족쇄로부터 해방된 느낌이었다.

기억에 남는 이야기는 이강호 강사님이 들려주신 ‘피맛골’ 이야기다. 공교롭게도 아카데미가 열린 종각역 근처가 피맛골이었다. 피맛골은 육조거리(지금의 광화문 대로)를 거닐던 양반들의 말을 피해 다니는 길이라는 뜻의 피마(避馬)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조선은 양반께서 행차하실 때 천한 백성들은 감히 고개를 들지 못하고 조아려야 하는 나라였기 때문이다. 노력과 능력에 따른 결과가 아닌, 단지 태생이 천하다는 이유로 말이다. 그리고 지금 북한인들은 여전히 조선시대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김씨 왕조를 봉양하는 노예 상태에 머물러 있다.

그렇다면 지금 대한민국은 어떨까. 출신과 태생에 상관없이 누구나 광화문 광장을 당당한 국민으로서 거닐고 있다. 양반을 보면 고개를 조아려야 했던 비참한 노예 상태에서 벗어난 것이다. ‘자유’를 천명(闡明)한 체제에 의해 개인이라는 독립적 지위가 보장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늘날 대한민국 국민을 조선시대로 부터 해방시킨 이 ‘자유’는 1948년 8월 15일, 자유민주주의라는 체재를 기반으로 한 대한민국정부수립이라는 세계사적 기적으로부터 탄생했다.

48년 당시 시대상을 고려해보면 ‘자유’와 ‘시장’의 가치를 잘 알고 있는 이승만이라는 지도자가 있었다는 사실은 기적이었다. 유라시아 대륙 전체가 사회공산주의로 붉게 물들어가고, 세계의 지식인들조차도 경도되어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승만이라는 건국대통령의 혜안과 결단에 의해 ‘덜컥’ 자유가 주어졌기 때문일까. 오늘날 우리 사회는 자유를 마치 당연히 존재해왔던 것으로 여기며 자유를 업신여기고 있다. 자유를 마치 미국이 들여 준 외제품과 같이 취급하며 말이다. 그리고 이러한 취급에 화가 난 ‘자유’는 오늘날 촛불이라는 이름으로 모여 자유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을 비커 속 개구리처럼 서서히 끓여 죽이고 있다.

자유는 너무나 위대한 가치라서, 그 가치를 지닐 만한 자격이 없는 사람으로부터 달아나려는 경향을 보이는 것 같다. ‘자유를 파괴할 자유를’ 원하도록 만들면서 말이다. 지난 ‘촛불’이 타락한 자유를 보여주는 생생한 사례다. 분노에 휩쓸려 법치를 무시하고 그야말로 반자유적인 대중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이 촛불이었기 때문이다. 대중의 뜻이라면 설령 대한민국이라 할지라도 엎어버리겠다는 무시무시한 분노가 광장을 가득 채웠지 않은가 말이다. 자유를 돌보지 않고 방치한 지난날이 낳은 끔찍한 결과였다.

자유를 파괴할 자유에 유혹을 느끼는 이유는 뭘까. 그것은 자유를 그저 무한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단순함 때문이다. 자유라는 가치에 고뇌해본 적이 없기에 김일성 만세를 외칠 자유도 보장되어야 진정한 자유사회라는 바보 논리에 자연스레 도달하는 것이다. 자유가 뭔지도 모른 채 자유를 달라고 외치는 것이다. 자유는 이미 충분한데 담을 그릇이 없어 줄줄 흘러버리기에, 당황하며 자꾸만 자유를 달라고 외치는 것이다. 김일성 만세를 외칠 자유일지라도 좋다고 냉큼 받아 삼키는 것이다. 김일성 만세를 외칠 자유를 탄압 하게 되면 그것은 개인의 자유를 탄압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 오니까, 자연스레 다른 생각과 경쟁하도록 보장해 줘야한다는 교묘한 바보논리를 삼키는 것이다. 자유로운 사회를 위하여 자유를 죽일 자유가 있어야 한다는 기막힌 생각이 완성되는 것이다. 기본이 없는 것에서 출발한 전형적인 좌파식 허우대 논리 구조다.

자유에는 자유를 파괴할 자유가 없다는 제약이 분명히 있다. ‘자유’라는 이름 때문에 유심히 살펴보지 않으면 잘 보이지 않는 문구다. ‘김일성 만세’는 다른 말로 ‘자유 파괴 만세’다. 이것은 김일성 만세를 외치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를 보호 하고 있는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위협하는 국가존망의 문제다. 자유가 없는 사회를 주장할 자유를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자유를 파괴하자는 주장을 존중해야 한다고? 그런 사회의 말로는 북한, 나치 정권일 뿐이다. 자유를 방치하는 사회에서 자유는 반드시 전체주의라는 괴물로 자라나게 되어있다.

결국 ‘자유’는 자유민주주의 체제 헌법이 지켜져야만 보장되는 것이다. 개인이 자유를 선언한다고 해서 자유가 보장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국가 안보라는 측면에 있어서 다른 자유선진국들이 여야 없이 모두 강경한 입장을 취하는 이유다. 결국 그 누군가가 말했던 무조건 사람이 먼저라는 말은 틀린 것이다. 왜냐하면 진정 사람이 먼저이기에 사람 앞에 법치를 세운 것이기 때문이다. 사적 권력이나 여론, 인민재판에 의해 개인의 자유가 침범당하지 않도록 만들어 놓은 보호 장치가 법과 질서이고, 그런 법치가 있기에 인간은 마침내 자유로운 것이다. 대중과 촛불이 법치 위에 있는 사회는 결코 자유롭지 않다.

오늘날 자유는 이미 충분히 주어져 있다. 지금은 자유로워야 할 때가 아니라, 자유를 파괴하려는 우둔함으로부터 자유를 지켜야 할 때다. 진정한 ‘보수’의 가치다. 그렇기에 우파는 ‘자유보수’인 것이다. 자유는 자유롭지 않다. 자유는 가만히 있어도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지키기 위해 싸워야 겨우 지닐 수 있는 가치다. 1948년 8월 15일, 이 날 천명된 자유대한민국 체제의 정통성과 정당성을 지켜나갈 힘과 체력을 길러야만 자유를 지닐 자격이 있는 것이다. 이제는 절대 불가침한 내 ‘자유’를 파괴하자고 주장하는 자들을, 자유를 살해하려는 자들을 방치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덜컥 가졌던 자유를 서서히 잃으면서, 비로소 자유의 가치를 되찾는 반성의 시간이다.

이재훈 시민기자(청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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