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립 페탱, 1차대전 '베르됭 전투'영웅-2차대전 비시 괴뢰정권 이끌어
프랑스유대인협회 "유대인 추방 감독한 인물 찬양에 '충격'"
전범재판서 찬성14표-반대13표로 유죄판결...당시 평가도 팽팽히 엇갈려
마크롱 "정치적 삶과 인간 본성 매우 복잡해...역사적 사실 간과말아야"

앙리 필립 페탱[연합뉴스 제공]
앙리 필립 페탱[연합뉴스 제공]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2차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에 협력한 괴뢰정권 ‘비시 프랑스’의 수장 앙리 필립 페탱(1856~1951)에 대해 “위대한 군인이었다”고 말하며 역사인물에 대한 객관적 평가를 강조했다.

프랑스 일간 르몽드에 따르면 마크롱 대통령은 7일(현지시간) 프랑스 북부의 1차대전 격전지 샤를빌 메지에르(Charleville-Mezieres)를 방문해 “우리 군대를 승리로 이끈 원수들에게 존경을 표하는 것은 전적으로 타당하다고 생각한다”며 “페탱이 1차대전에서 위대한 군인이었다는 것은 사실”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그가 2차세계대전에서는 재앙적인 선택을 했다”며 “공과 과가 모두 있다”고 강조했다.

이 같은 발언은 마크롱 대통령이 오는 토요일 1차세계대전 100주년 기념식에서 페탱을 포함한 8명의 프랑스 장군을 기념하기로 하면서 나왔다.

페탱은 1916년 2월에 벌어진 베르됭 전투(Battle of Verdun)에서 독일군의 공세를 저지시킨 1차세계대전 전쟁영웅이다.

베르됭 전투를 계기로 연합군이 전체 전쟁 판도에서 우위를 확보했고 결국 독일이 패망으로 연결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또 페탱은 부하들에게서 받는 두터운 신망으로 프랑스군의 대규모 항명사태를 성공적으로 진압해 ‘적전분열(敵前分裂)’의 위기를 극복했다.

이러한 공로와 업적을 인정받은 그는 1918년 11월 ‘프랑스의 원수(元帥)로 승진했다.

그러나 이후 2차대전이 터지고 프랑스가 1940년 5월 독일에 점령당하자 그는 휴전파의 중심인물로 히틀러와 강화를 맺고, 남부 비시에 나치에 협력하는 부역 정권을 세웠다.

페탱은 2차대전이 나치의 패배로 끝나자 1945년 전범재판에서 반역죄가 인정돼 찬성14표에 반대13표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종신형으로 감형돼 유배지인 되섬(島)에서 1951년 91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페탱에 대한 평가는 프랑스에서 줄곧 논란의 대상이 돼 왔다. 그에 대한 최종판결이 1표차로 갈린 점도 페탱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평가가 복잡했음을 시사한다.

그가 2차대전 발발당시 스페인 주재 대사였으나 프랑스군이 붕괴하자 고국으로 돌아와 내각을 수습했던 점, 비시 정부를 이끌 당시에도 프랑스의 이익을 최대한 지키려 노력했던 점, 1944년 독일군에 체포돼 독일로 이송됐지만 1945년 4월 스스로 귀국해 재판을 받았던 점 등이 그에 대한 우호적 여론유지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나치에 협력해 수천 명의 유대인을 추방한 점은 지울 수 없는 과오로 평가된다.

이날 마크롱 대통령의 발언이 알려지자 프랑스유대인협회의 프랑시스 칼리파 대표는 성명을 통해 “수많은 유대인 추방을 감독한 사람을 찬양한 것에 대해 ‘충격’을 받았다”며 “단 한가지 우리가 기억할 것은 페탱이 저지른 국가적 치욕으로 그가 프랑스 국민의 이름으로 1945년 유죄판결을 받았다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연합뉴스 제공]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연합뉴스 제공]

야권과 유대계 인사들로부터 거센 비판이 일자 마크롱 대통령은 “나는 역사의 어떤 페이지도 간과하지 않는다”며 “정치적 삶과 인간의 본성은 우리가 믿는 것보다 훨씬 복잡할 때가 있다”고 역사인물의 공과에 대한 객관적 평가를 강조했다.

프랑스 정부 대변인도 별도 논평에서 “(‘자유 프랑스’ 망명정부를 이끌며 페탱과 반대의 길을 간)샤를 드골마저도 페탱이 베르됭에서 세운 영예에 대해 의심할 여지가 없다는 사실을 인정했다”고 밝혔다.

조준경 기자 calebcao@pennmik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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