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의 증인’과 국가

필자가 초등학교 다닐 때, 군대에 갔던 친척 형이 휴가 와서 친지들 앞에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하루는 새로이 배치된 신병이 보초를 서게 되었다. 그런데 이 신병이 보초수칙을 무시하고 총 대신에 몽둥이를 들고 보초를 서겠다고 하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타일렀지만 말을 듣지 않아 나중에는 두들겨 팼지만 이 친구는 끝내 몽둥이를 들고 초소로 향하였다. 이 신병은 ‘여호와의 증인’ 신자였다.

그 후 필자는 이런 생각도 하였다. 만약 대한민국이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지 않은 나라이고 ‘여호와의 증인’이 국교가 되었다고 생각해보자. 그러면 대한민국은 집총거부라는 종교의 교리가 정치를 지배할 것이고 이럴 때 전쟁이 나면 병사들은 ‘돌격 앞으로’를 외치며 모두 몽둥이를 들고 적진으로 뛰어들어야 할 것이다. 물론 이들은 모두 도중에서 전멸할 것이고 나라는 종교가 없는 무신론자들에게 점령당할 수도 있다. 그때 ‘여호와의 증인’을 국교로 하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는 양심이고 무엇이고 따질 겨를도 없게 될 것이다. 조선왕조 1592년에 일어난 임진왜란 당시, 살생을 금지하는 부처의 계율을 철저히 따르는 서산대사 휴정, 사명당 유정이 승군(僧軍)을 조직하여 강토를 피로 물들였던 침략군 왜병에 맞섰다. 이는 살생을 금지하는 계율보다 사직의 보전이 선행되어야 부처의 계율도 지키고, 종교의 자유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가톨릭교회와 국가(國家)

가톨릭교회교리서 2310항은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군인생활로 조국에 대한 봉사에 헌신하는 사람들은 국민의 안전과 자유를 위한 역군이다. 이 임무를 올바로 수행한다면, 그들은 참으로 국가(國家)의 공동선(共同善)과 평화 유지에 기여하는 것이다.”

필자는 초등학교 5학년 무렵 가톨릭교회에서 첫영성체를 위한 교리교육을 받았었다. 교육 시간에 군인들의 전투장면이 스크린에 비추어졌고 교육하시던 수녀님이 전쟁에서 적을 향하여 총을 쏘는 것은 국가를 지키기 위한 것이므로 가톨릭 교리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라는 설명을 해주셨다.

베네딕토 16세 교황이 2005년 반포한 회칙(回勅)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는 28항에서 다음과 같이 가르치고 있다. “그리스도교는 근본적으로 황제의 것과 하느님의 것을 구분합니다. (마태오 복음 22, 21 참조) 다시 말해, 교회와 국가의 구분 또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표현대로, 현세사물의 자율성입니다.”

즉 국가와 교회 모두 나름대로 고유의 진리와 선, 가치와 질서를 지니며 국가가 종교를 강요해서도 안 되고, 종교가 신앙을 공유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신앙의 고유한 사고방식과 행동양식을 강요해서도 안 된다고 분명히 선을 긋고 있다.

국민정서에 반하는 대법원의 판결

최근 종교적 신념에 따른 양심적 병역거부자에 대하여 대법원이 무죄판결을 내렸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대법원의 판결에 대하여 적지 않은 정서적 반감을 나타내고 있다. 심지어 ‘우리는 양심이 없어서 군대에 갔느냐?’는 자조 섞인 비난마저 들린다.

‘여호와의 증인’을 믿는 사람들은 군대에 가더라도 자신의 신앙과 행동방식에 따라 집총을 거부하면서 얼마든지 훈련받을 수 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영화 ‘헥소 고지’(Hacksaw Ridge)를 보면 데스몬드 도스라는 실제 인물이 주인공으로 나온다. 그는 병역을 거부하지 않고 입대하여 자신의 신념대로 집총만을 거부하였지 모든 훈련을 소화한다. 다만 그는 주위로부터 겁쟁이 또는 비겁한 인간으로 취급받았다. 그는 오키나와 헥소 고지의 전투에 의무병으로 참전하여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고 수십 명 전우의 생명을 구하여 비전투병으로는 처음으로 미 육군 최고의 훈장을 받았다.

대한민국의 헌법 20조 2항에 따라 정치와 종교는 분리되어야 한다. 따라서 종교의 교리가 대한민국의 법위에 있을 수는 없다. 대한민국은 국민계병주의를 택하고 있고 헌법 상 종교의 교리가 국가의 법 위에 존재할 수 없으므로 ‘여호와의 증인’ 신자들이 자신의 교리를 지키겠다면 국법에 따라 그에 따른 불이익도 감수하여야 한다. 그래야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를 보존할 수 있고 국가의 안전을 지킬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 문재인 정부가 김정은을 선량하고 솔직한 지도자로 포장하면서 국민의 대공 경계심을 약화시키고 안보태세를 허물고 있다. 또한 병역기간 단축, 양심적 병역거부자 무죄판결 등 안보무력화에 온 정열을 쏟는 것 같아 양식 있는 시민들의 우려를 자아내고 있다.

양심적 병역거부권을 인정하라는 소리는 이미 오래전부터 나왔다. 2002년 2월에 34개 시민단체가 참여하여 ‘병역거부권 실현과 대체복무제도 개선을 위한 연대회의’를 발족하였다. 양심적 병역거부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군복무에 상응하는 기간만큼 사회봉사 등 대체복무를 함으로써 병역의 형평성을 유지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들의 대체복무란 기초군사훈련도 받지 않고 다른 병역필자가 복무 후 예비군 훈련과 전시참전의무를 지는 데 반하여 이들은 대체복무 후 어떤 병역의무도 지지 않는 사실상의 병역면제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이들이 말하는 병역의 형평성이란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 양심적 병역거부자에 대하여 심리한 대법관들은 최소한 이러한 점을 알아야 했다.

양심적 병역거부자에게 고한다.

대부분의 젊은이들은 양심이 없어서 군대에 가는 것이 아니라 더 큰 양심을 지키기 위하여 군대에 가는 것이다. 또 자유가 싫어서 군대에 가는 것이 아니라 더 큰 자유를 지키기 위하여 군대에 가는 것이다. 양심과 명분을 내세우는 이들은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폭력에 저항한다는 것을 명분으로 내세운다. 전쟁에서 적을 죽이는 것은 사적 원한에 의한 살인이 아니라 조국과 가족을 위한 더 큰 대의명분을 위한 것이다.

훈련소에서 훈련이 끝나고 행군하면서 지겹도록 부르는 ‘진짜 사나이’라는 노래 중에 ‘부모 형제 우릴 믿고 단잠을 이룬다.’라는 노랫말이 있다. 우리는 자신의 양심이 아니라 국가(國家)와 부모형제를 위하여 신성한 병역의 의무를 다하는 것이다. 젊은 세대가 20개월 정도의 병역기간 중 자유는 일부 구속되더라도 우리의 생존을 지킴으로써 평생을 자유로워질 수 있음을 왜 알지 못하는가? 전쟁이 나면 포탄과 총알이 양심적 병역거부자와 그 가족만을 피해가지는 않는다. 핵무기와 화학가스를 지니고 있으며 이 세상에서 가장 포악한 북한의 공산주의자들과 대치하고 있는 분단국가에서 양심이라는 사치스러운 명분이 이토록 힘을 발휘할 수 있단 말인가? 공산주의를 똑똑히 알아야 한다. 이러한 명분론자들이 포악한 수령유일신 신정체제(神政體制)하에서 하루라도 견딜 것 같은가? 이 나라가 적화(赤化)되었을 때 당신들은 ‘양심적 병역거부’의 ‘양’자도 꺼내지 못할 것이다. 그랬다간 당신의 양심은 요덕수용소에 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김원율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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