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민 증언 바탕 김정은 집권기 포함 3년 6개월 실태 보고
“북한서 성폭력은 널리 용인된 비밀...구제책 부재”

케네스 로스 휴먼라이츠워치(HRW) 사무총장이 1일 오전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북한의 성폭력 실상을 담은 보고서를 들고 있다(연합뉴스).
케네스 로스 휴먼라이츠워치(HRW) 사무총장이 1일 오전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북한의 성폭력 실상을 담은 보고서를 들고 있다(연합뉴스).

최근 북한 인권 문제에 대한 국제사회의 압박 수위가 계속 높아지고 있다.

지난달 31일(현지시간) 유엔총회 인권 담당인 유엔 제3위원회에 북한 인권 상황을 규탄하는 북한인권결의안이 제출됐다. 또한 1일 서울에선 국제 인권단체 휴먼라이츠워치(HRW)가 북한 권력층의 성폭력 실태를 고발하는 기자회견을 개최했다.

유럽연합(EU)과 일본이 작성을 주도한 북한인권결의안은 작년처럼 “북한에서 오랜 기간 조직적이고 광범위하며 중대한 인권침해가 진행되고 있다”는 내용이 담겼다. 또한 ‘가장 책임 있는 자’에 대한 제재·조치를 권고했다.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을 겨냥한 표현이다. 결의안이 11월 중순 제3위원회를 거쳐 12월 본회의까지 통과하면 2005년 이래 14년 연속 채택된다.

HRW는 이날 탈북민들의 직간접적 성폭력 피해 사례를 토대로 작성한 ‘이유 없이 밤에 눈물이 나요: 북한의 성폭력 실상’이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공개했다. 김정은이 집권한 2011년 이후 탈북한 57명 등 106명을 인터뷰한 내용이다. HRW는 보고서를 통해 “북한에선 정부 관리들의 여성 성폭력이 만연한데 사회적 낙인과 두려움, 구제책 부재로 신고·처벌이 거의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주장했다.

여성 탈북민들은 성폭력 가해자로 고위 당 간부, 구금 시설의 감시원·심문관, 보안성·보위성 관리, 검사, 군인을 꼽았다. 북한에선 1990년대 후반부터 국영 작업장에 나가지 않아도 되면서 기혼 여성 상당수가 장마당 등에서 장사로 가족의 생계부양자가 됐다. 이 가운데 성차별과 남성우월주의가 만연한 북한에서 여성들이 장마당을 단속·감시하는 정부관리들과 직접 마주하게 되면서 성폭력의 위험에 크게 노출됐다고 보고서는 지적했다.

HRW의 인터뷰 대상 중에서 북한에서 장사 경험이 있는 여성 21명은 여러 지역을 이동하면서 보안원 등 관리들로부터 성폭행과 성추행을 당한 적이 있다고 증언했다.

2014년 탈북한 40대 오정희(가명) 씨는 “그들은 내키는 대로 장마당 밖 빈방 등에 따라오라고 했고, 수차례 성폭행을 했다”고 했다. 2009년 ‘집결소’에 구류된 30대 윤미화(가명)씨는 “억류 기간 밤마다 예쁘고 어린 소녀들이 심문을 이유로 불려나가 성폭행을 당했다”고 했다. 여성들이 감시원·보안원 등의 요구를 거절하면 수감 기간 연장, 구타, 강제노역 등에 처해졌다. 오 씨는 성폭력이 너무도 흔하게 일어나기 때문에 남자들은 그것을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여자들도 그냥 받아들이게 되었다고 증언했다.

이날 기자회견에 참석한 탈북민 출신 이소연 뉴코리아여성연합 대표도 “북한에서 군생활할 당시 부대에 ‘재판관’이라는 사람이 나와 여군 30여명을 조사했고 그 중 3명이 군 간부와 ‘놀아났다’는 죄목으로 불명예 제대하는 일이 있었다”고 밝혔다. 이 대표는 “가해자가 아닌 성폭력 피해 여성들만 처벌을 받은 것”이라며 “내가 북한에서 나온 지 10년이 지났지만 이같은 여성 인권 침해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라고 강조했다.

HRW는 사회적 낙인과 보복에 대한 두려움과 구제책의 부재로 피해를 신고하는 여성이 없다고 지적했다. 또한 뿌리 깊은 남녀불평등과 성교육·성폭력에 대한 인식 부재가 이러한 실상을 부추긴다고 지적했다.

케니스 로스 HRW 사무총장은 “북한에서 성폭력은 누구나 알고 있지만 아무도 대응하지 않으며, 널리 용인되는 비밀”이라며 “북한여성들도 어떤 식으로든 사법적으로 대응할 방법이 있다면 ‘미투’라고 말하겠지만 김정은 독재정권 하에서 그들의 목소리가 침묵당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김정은 독재 정권하에서 피해자들은 침묵을 강요당하고 있다”며 “북한과의 대화에서 비핵화만 언급하면서 인권문제는 우선순위에서 밀렸는데, 이를 분리해선 안 된다”고 했다. 그는 최근 “인권 변호사 출신인 문재인 대통령이 북한인권 문제를 회피하는 것을 이해하기 어렵다”고 했다.

그러나 북한은 거세게 반발했다. 스위스 제네바 주재 북한 대표부는 이날 HRW의 보고서에 대해 “근거 없고 날조된 이야기로, 이른바 우리의 ‘인권’ 문제를 제기해 화해를 막으려는 것”이라며 “조선반도에서 이뤄지는 평화와 화해, 번영, 협력을 불편하게 느끼는 적대세력의 헛된 노력”이라고 주장했다.

양연희 기자 yeonhee@pennmik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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