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자 상명대 명예교수, 서울대 불어불문학 전공.
박정자 상명대 명예교수

가시성과 권력

전통적으로 권력은 언제나 떠들썩하게 자기를 과시했다. 서양의 중세 도시 광장에서 죄수를 잔혹하게 고문한 후 처형하는 날이면 사람들은 생업을 전폐하고 구름처럼 모여 환호성을 질러댔다. 고문이 잔혹하면 할수록 군중의 환호성은 높아졌다. 완전히 카니발의 축제날이었다. 공개처형은 죄수를 잔인하게 징벌하는 과정을 백성들에게 보여줌으로써 군주에 대한 경외감을 높이는 일종의 통치 수단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공개처형이 광장에서 사라졌다. 권력과 죄수 사이의 역할의 전도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권력을 두려워하고 죄수를 조롱하던 군중이 어느 순간 그 조롱의 화살을 권력에 돌리며 오히려 고문당하는 죄수를 영웅으로 찬양하기 시작한 것이다. 내심 놀란 권력은 서서히 떠들썩한 자기 과시를 버리고 조용히 어둠 속으로 숨어들었다. 공개 처형은 슬그머니 없어졌고, 죄수들에 대한 처벌은 그저 감옥에 가두거나 아니면 사람들 모르게 은밀한 장소에서 집행되는 사형으로 대체되었다. 근대가 시작된 것이다.

예전에 군주는 화려한 스펙터클의 무대 위에서 민중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는 사람이었다. 민중은 어둠 속에서 환한 무대 위 군주의 얼굴을 바라보기만 하는 사람들이었다. 장엄한 군사 퍼레이드를 사열하는 군주와 그것을 구경하는 얼굴 없는 민중의 모습이 그러했고, 어두운 지하 감옥에 갇힌 죄수들과 그들을 감시하는 간수의 관계가 그러했다. 근대 이전에 민중은 ‘보는’ 사람, 권력은 ‘보이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공개처형장에서 권력과 죄수의 관계가 역전된 이래 가시성(可視性)의 관계도 역전되었다. 권력이 ‘보는’ 사람이 되었고, 민중은 ‘보이는’ 사람이 되었다. 권력의 가시성이 지속불가능 해졌으므로 백성들의 가시성이 불가피하게 된 것이다. 권력은 이제 자신의 모습을 감추면서 힘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소위 판옵티콘적 권력이다. 왕조 시대에는 ‘보여질 수 있음’, 즉 가시성이 권력을 생산했는데, 근대 이후에는 정반대로 가시성이 예속을 생산했다. 이제부터는 보는 자가 권력이고, 보이는 자가 피지배층이다.

가시성은 빛과 시선이 있어야 실현되는 현상이다. 골방 안의 책상이 내 눈에 보이려면 햇빛이나 전등불이 있어야 하고, 그것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이 있어야 한다. 환하게 빛이 비쳐도 그것을 바라볼 시선이 없으면 가시성은 실현되지 않는다.

따라서 바라봄을 허용하는 기술이 권력의 가장 중심적인 요소가 되었다. 한 개인을 예속의 상태로 유지하려면 하나의 중심점에서 단 한 번의 시선만으로 그의 모든 것을 다 볼 수 있어야 한다. 한 중간에서 한 순간에 아무것도 놓치지 않고 모든 것을 다 볼 수 있는 일목요연(一目瞭然)의 완벽한 눈이 필요한데, 그것이 바로 판옵티콘이다.

판옵티콘

판옵티콘(pan opticon)은 영국의 공리주의 철학자 제레미 벤담이 1791년에 제안한 원형감옥의 이름이다. 그리스어로 ‘모든 것을 본다’라는 의미이며, 하나의 시선만으로 모든 것을 다 볼 수 있는 완벽한 감시 장치다.

판옵티콘 개념도
판옵티콘 개념도

벤담이 구상한 감옥 개념도에 의하면 판옵티콘은 고리(環) 모양의 원형 건물이다. 원형 건물은 칸칸이 독방들로 나뉘어져 있고, 독방들은 안마당과 외부 쪽으로 동시에 출입구가 뚫려져 있다. 양 방향의 출입문으로 언제나 빛이 통과하므로 독방들의 내부는 밖에서 환하게 들여다보인다. 독방들에는 죄수들이 각기 1명씩 감금되어 있다. 독방의 양쪽 벽은 물론 단단한 벽이어서 죄수들 상호간의 접촉은 차단되어 있다.

이 원형 건물 안 마당 한 중심에 높은 감시탑이 있다. 탑에는 빙 둘러 창문이 있는데, 창문 안에는 지그재그로 칸막이가 설치되어, 밖에서는 안이 잘 들여다보이지 않는다. 여기에 감시인이 한 명 배치되어 있다. 중앙 탑은 빛이 차단되어, 밖에서 보면, 감시인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할 수 없지만, 독방은 역광에 의해 내부가 환하므로, 밖에서 언제나 죄수의 움직임을 정확하게 포착할 수 있다. 그러니까 죄수들은 감시인에 의해 보여지기만 할 뿐, 스스로 감시인을 볼 수는 없다. 그들은 정보의 대상일 뿐 주체가 아니다.

시선의 불균형, 시선의 비대칭성을 이보다 더 잘 실현시킨 건물은 일찍이 없었다. 죄인을 가두고, 빛을 차단하고, 그들을 사람들로부터 숨겼던 옛 지하 감옥의 세 가지 기능 중에서 첫 번째만 보존하고 나머지 두 기능은 없앤 구조이다. 밝은 빛과 시선 앞에 드러냈으므로 얼핏 죄수를 인간적으로 대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빛과 어둠 중 오히려 죄수들을 보호하는 것은 어둠이다.

어두운 지하 감옥이었기 때문에 몽테크리스토 백작은 간수의 눈을 피해 탈옥할 수 있었다. 감시자가 훨씬 수월하게 죄수들을 감시하고 통제할 수 있게 된, 눈부시게 밝은 판옵티콘의 감옥에서 이제 죄수는 탈옥의 꿈도 꾸지 못한다. 죄수들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남김없이 포착하고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충분한 빛 속에서이지 어둠속에서가 아니다. 빛과 가시성은 수감자들에 대한 인간적 대우가 아니라 좀 더 효율적으로 감시하기 위한 함정이었다고 푸코는 말한다.

판옵티콘은 한 번 설치해 놓으면 그 메커니즘이 자동으로 작동되는 매우 경제적인 장치이다. 그 작동의 원리는 이러하다. 중앙탑 창문 안에 칸막이가 있어 빛을 차단하므로 그 안에 있는 감시자의 모습이 죄수들에게는 보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으므로 감시인이 거기에 있는지 없는지 죄수들로서는 확인할 길이 없다. 그러나 감시인이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으므로 그는 자신이 항상 감시 받고 있다는 의식을 갖게 된다. 이렇게 항상 누군가에게 감시받고 있다는 의식만 있으면 된다. 이 항구적인 가시성이 권력의 자동적 기능을 보장해 준다. 즉 그 자리에 감시자가 없어도 감시의 효과는 지속적으로 확보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감시 행위는 실제에 있어서 지속적일 필요가 없다.

여기서 벤담은 권력은 가시적이어야 하나 확인될 필요는 없다는 원칙을 제시한다. 감시만으로는 불충분하고, 끊임없이 감시당하고 있다는 죄수의 자각이 있어야 비로소 감시의 효과가 완성된다. 죄수는 자신이 항상 감시받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어야 한다. 이와 같은 가시성의 지속적 상태가 권력의 자동적인 기능을 보장해 준다.

판옵티콘은 마치 자동 기계와도 같아서 누구나 그 자리에 들어가면 간단히 작동시킬 수 있다. 정보기관의 수장이 우파가 되든 좌파가 되든 감시 기능은 자동적으로 돌아간다는 이야기다. 더 이상 군주의 예식이나 폭력의 과시 같은 것은 필요 없게 되었다. 시선의 비대칭성, 불균형, 차이를 보장해 주는 장치만 있으면 권력은 최대한으로 가동된다. 소위 권력의 익명성이다.

앎-권력

그렇다면 가시성은 왜 권력을 생산하는가? 단순히 눈으로 보기만 하는데 왜 거기서 권력이 발생하는가? 눈으로 뭔가를 보면 거기서 뭔가를 알게 되기 때문이다. ‘앎’이라는 것은 단순한 정보일 수도 있고, 고도의 학문적 지식일 수도 있다. 여하튼 모든 앎은 보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런데 ‘아는 것은 곧 힘이다’. 다시 말해 앎은 곧 권력이다.

‘아는 것이 힘이다. 배워야 산다’라는 우리의 30년대 문맹퇴치 운동 구호는 서양 계몽주의 철학의 격언을 그대로 패러디한 것이지만, 이 한 마디 말 안에 푸코의 권력론이 압축 요약되어 있다. ‘무언가를 안다는 것은 곧 권력’이다. 현재 좌파 정권이 우파 인사들을 감옥에 가두었고 또 앞으로 가두려 하는 것은 그들이 국가를 장악했기 때문이고, 국가는 모든 정보를 알고 있는 장치이기 때문이다. 알고 있다는 것은 한 사람의 생명을 빼앗을 수 있는 무서운 무기이다.

학문적인 앎을 우리는 지식이라고 부른다. 지식 역시 권력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인간의 육체에 직접적인 강제를 가하던 왕조시대의 권력이 사회 전체를 교묘하게 감시하는 근대권력으로 전환될 수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지식(앎) 덕분이었다. 중세 도시의 상인 계급이었던 부르주아들이 왕과 귀족을 타도하고 최종적인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것도 지식 덕분이었다. 1천 년 동안 다져진 혈통의 명예도 없고, 평생 무위도식하며 사치를 누릴 수 있는 재산도 물려받지 못한 이 계급에게 건강한 육체와 명석한 두뇌는 유일한 재산이었다. 이들은 앎이 총칼보다 무서운 권력 쟁취의 수단이라는 것을 역사적으로 증명해 보여준 계급이었다.

진실이란 무엇인가?

과거의 권력은 총칼로 무지막지하게 누르는 물리적 폭력이었다. 힘은 있을지언정 지적인 것과 거리가 멀고 무식했다. 그러나 근대 이후의 권력은 무식하지 않다. 무식한 권력은 지속될 수 없다. 무력으로 권력을 얻었다 하더라도 권력자는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주변에 학자들을 불러 모은다. 논리적으로 설득하지 못하는 물리적 폭력은 국민의 복종을 얻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안토니오 그람시의 헤게모니 이론은 단순히 공산주의 이론을 넘어서 현대의 권력 개념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개념이다.

앎이 곧 권력이라는 푸코의 권력론은 마르크스의 이분법적 계급투쟁 이론을 단숨에 해체시켜버린 새롭고도 충격적인 문제틀이었다. 20세기 후반에 푸코가 그토록 강한 대중적 호소력을 가질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런데 한 번 생각해 보자. 모든 사회 안에서는 수많은 담론들이 생산된다. 그중의 어떤 담론은 당당한 지위를 누리며 그 사회에서 지배적 영향력을 행사하는데, 다른 어떤 담론들은 주변부로 밀려나 침묵을 강요당하다가 결국 소멸되고 만다. 왜 어떤 목소리는 크게 들리고 다른 목소리는 들리지 않을까?

여기서 결정적인 기준이 진실이다. 한 담론이 다른 담론을 억제하고 배제하는 수단은 다름 아닌 진실이다. 진실이라는 말 앞에서 사람들은 꼼짝 못하고 승복한다. 그러나 진실은 과연 진실일까? 진실은 더 이상 자율적인 지적 구조가 아니라 사회를 통제하기 위한 체계이다. 진실은 결코 순결무구하고 유일무이하며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언제나 권력과 욕망에 물들어 있다.

진실은 시대와 장소에 따라 다른데, 그것을 결정하는 것이 힘의 관계이다. 그러므로 담론의 생산자들은 서로 진실의 고지를 장악하려 격렬한 싸움을 벌인다. 김정은은 고모부를 고사포로 처형하고 이복형을 독살한 잔인한 독재자라는 것이 불과 1년 전의 진실이었는데, 알고 보니 김정은은 귀엽고 예의 바르고 겸손한 젊은 지도자이더라는 새로운 진실이 대두되었다. 이 진실에 수긍하는 사람의 숫자가 많아지면 사회의 헤게모니는 그 진영으로 넘어갈 것이다. 그러므로 진실을 담보하고자 하는 의지는 곧 권력의지다.

한 사회의 지적 헤게모니를 장악한 사람들이 진실이라고 결정하면 그것은 곧바로 진실이 된다. 이들은 많은 사람들의 동의를 받아내기 위해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논리를 확산시키는 데 최대의 노력을 기울일 것이다. 그들의 노력이 권력을 쟁취하겠다는 또는 유지하겠다는 핏발 서린 전략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 민중만이 그 진영의 달콤한 수사에 휩쓸려 자발적 동의를 보낸다.

그러므로 무엇이 진실인가에 대한 싸움은 절대적 진리를 위한 싸움이 아니라 권력 쟁취의 싸움이다. 북침설이니 수정주의니 하는 6.25 전쟁의 진실, 또는 위안부가 강제로 모집되었느니 아니니 하는 문제, 친일파로 몰리면 역사적으로 매장되는 우리 사회의 역사 인식, 그리고 광우병이나 세월호 사태 등에서 우리는 그것을 가슴 아프게 확인하고 있다.

전자 판옵티콘과 심재철 의원

판옵틱한 감시는 자신의 모습은 철저하게 가린 채 사회 전체를 지속적으로 감시하는 편재(遍在)적 시선이다. 마치 얼굴 없는 시선과도 같다. 그것은 도처에 매복된 수천 개의 눈이고, 항상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는 주의력이며,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서열화된 그물눈이다. 현대 사회의 특유의 미시(微視)-권력, 일상적 권력은 이 감시가 만들어낸 권력이다.

학문의 세계에서 잊혀졌던 벤담의 판옵티콘을 현대 사회로 가지고 와 고유의 권력이론을 만든 것은 푸코였지만, 그는 인터넷이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기 이전인 1984년에 죽었다. 가공할만한 대량 전달력을 가진 인터넷이 우리의 삶 속에 더욱 미세하게 깊이 스며들어 우리를 감시하고 있는 현상을 그는 알지 못했다. 이후 학자들은 인터넷이 도래한 세상의 디지털 감시체제를 전자 판옵티콘이라 불렀다.

빠르게 변하는 시대이므로 그의 이론 또한 우리 시대에는 조금 맞지 않는 것으로 드러났다. 보는 자가 권력이고 보이는 자가 피지배층이라는 시선의 비대칭성 이론이 특히 그러하다. 이미지가 절대권력을 행사하는 대중 엔터테인먼트의 시대에 엄청난 권력을 쥐고 있는 것은 TV에 많이 등장하는 정치인이나 연예인이지, 어둠 속에서 밝은 무대 위의 그들을 바라보는 대중이 아니다.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는 구호를 외치며 밤마다 광화문 광장을 가득 메워 보았자 권력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무대 위에 있던 몇몇 사람의 수중으로 들어갔을 뿐이다. 캄캄하고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서 겨우 촛불에 의지해 환한 무대 위를 열심히 바라보던 그들에게 남겨진 것은 두 집 건너 한집씩 폐업한 상가건물들, 아르바이트 자리도 얻기 힘든 가혹한 청년 실업뿐이다. 민중은 ‘보여지는 자’, 권력은 ‘보는 자’라는 푸코의 가설은 여지없이 빗나갔다.

또 하나의 어긋남은 시선의 방향, 즉 감시의 방향이다. 국가권력은 압도적이어서 개인이 일방적으로 엄청나게 국가의 감시를 받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디지털 시대에 감시는 한 쪽 방향으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한없이 서로 스며들고 흘러가는 컴퓨터 메커니즘의 특성상 권력 자체의 민감한 정보가 노출될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심재철 의원이 공개한 ‘청와대 업무추진비 부당사용’ 자료에서 우리는 그런 가능성을 본다. 더불어민주당은 비인가 행정정보 유출 사태라며 자료 획득 과정만을 문제 삼고 있지만 ‘국민’인 우리는 이미 정부 인사들의 민낯을 다 알아 버렸다. 마치 온 세상의 정의는 다 독점한 듯 ‘문대통령 치약, 칫솔도 사비 계산’이라고 홍보하던 청와대가 알고 보니 최고급 스시집과 이탈리아 식당만 드나들며 밥을 먹고 있었던 것이다. 레스토랑 르꼬숑에서 32차례 569만원, 이탈리안 레스토랑 까델루뽀에서 44차례 663만원, 프랑스 음식점 더레스토랑에서 62차례 985만원, 일본음식점 스시효에서 38차례 1,131만원이 지출되었고, 백화점에서의 지출도 8,826만원이나 된다. 언제나 약자를 위한다는 이들이 최고급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했다고 해서 우리가 굳이 비난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말과 실제 행동이 다른 그들의 위선성이야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니 말이다. 그러나 그 비싼 비용을 우리의 세금으로 지출했다는 것은 참을 수 없는 불쾌감이었다.

절실하게 요구되는 합리성

헤게모니가 진실을 만드는데, 또 진실은 헤게모니를 만들어준다,라는 푸코의 권력론은 어찌 보면 해석학적 악순환이기도 하다. 이 악순환에서 빠져 나오려면 역시 이성과 합리성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다. 즉 우리 사회 구성원들 최대다수가 행복한 삶을 누리기 위해서는 어떤 방향이 가장 옳은 길인지를 이성적이고도 합리적으로 보여주는 이론이 지배적 담론이 되어야 한다.

생각해 보면 모든 사회는 자기 고유의 진실 생산 체계를 가지고 있다. 즉 참과 거짓을 가르고, 어떤 앎을 진실이라고 받아들일 것인지를 결정하는, 모든 사람이 동의하고 합의한 일반 원칙이 있다. 이 원칙에 의해 결정된 진실은 교육제도, 언론, 정치 등에 의해 지속적으로 강화된다. 그 사회 대부분이 동의한 일반원칙이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것일 때 그 사회는 건전한 선진 사회일 것이다. 합리성 없는 원칙이 대중의 다수성이라는 물리적 힘을 업고 사회를 지배할 때 그 사회는 불화와 갈등으로 갈가리 찢겨 후진적이고 불행한 사회가 될 것이다. 사악한 집단으로부터 엄청난 감시 장치를 하루 빨리 빼앗아 와야만 하는 이유이다.

박정자 객원 칼럼니스트(상명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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