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정욱 칼럼] 대체 역사, 좀 더 신나고 스케일 큰 건 안 되겠니?
[남정욱 칼럼] 대체 역사, 좀 더 신나고 스케일 큰 건 안 되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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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정욱 객원 칼럼니스트
남정욱 객원 칼럼니스트

경성이 뜨고 있다. 개화기 의상을 빌려 입은 남녀가 경성 과자점이라는 옥호의 가게에서 서양과자를 사 먹고 덕수궁 근정전을 산책한다. 서울이 아닌 경성, 일제 치하 식민지의 수도가 쇠잔과 영락(零落)의 이미지를 털고 향수의 대상으로 유행하는 것은 재미있다. 이런 현상을 만들어 낸 1등 공신은 당연히 영상 미디어다. 드라마 ‘시카고 타자기’와 ‘미스터 선샤인’ 그리고 영화 ‘석조저택 살인사건’ 등은 오로지 암울하기만 했을 것이라는 통념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가 격동기의 매력을 발굴한다. 근대의 재해석 수준을 넘어 아예 근대를 새로 만드는 이 같은 흐름의 기저에는 대체 역사라는 익숙한 유희가 깔려 있다. 대체 역사는 두 종류다. 실제 역사보다 나은 과거를 보여주는 것과 반대로 실제보다 훨씬 못한 과거를 보여주는 것. 아무래도 유행은 전자다. 보는 사람에게 일시적으로 오르가즘을 안겨준다. 물론 과하면 ‘국뽕’ 소리를 듣는다. 그런데 답답한 게 좀 있다. 하나 같이 사이즈가 작다. 알고 보니 고종이 독립운동을 몰래 지원했다든지, 만든 사람들은 역사물이라고 주장하지만 이름 빼고는 사실과 일치하는 바가 하나도 없는 ‘덕혜 옹주’ 같은 것들이 그런 부류다. 비루하고 변명 같고 치사하고 구차해 보인다. 어차피 대체 역사인데 좀 더 화끈하게 나가면 어디가 덧나나. 물론 대체 역사에도 규칙은 있다. 내러티브를 연결하는 역사적 팩트다. 그걸 안 지키면 대체 역사가 아니라 소설이 된다.

퐁텐블로 성은 파리에서 한 시간 정도 거리에 있는 유서 깊은 성이다. 수많은 왕들이 거쳐 갔지만 이 성을 가장 사랑했던 사람은 나폴레옹이었다. 엘바 섬으로 유배를 가기 전 나폴레옹은 퐁텐블로 성에서 친위대와 작별 인사를 했다. 그래서 성 앞 광장을 눈물의 광장이라고 한다. 프랑스 여행에서 본 퐁텐블로 성은 소문만큼 멋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나폴레옹이라는 인물 하나 때문에 퐁텐블로 성은 각별했고 반가웠다. 배질 홀(Basil Hall)이라는 영국인이 있다. 1816년에 우리나라에 왔던 인물인데 호기심이 많고 관찰력이 뛰어났다. 그가 쓴 ‘조선 서해안과 류큐 섬 탐사기’는 탐사 문학의 고전이 되었다. 배질 홀은 귀국길에서 대서양의 작은 섬 세인트 헬레나에 들르게 된다. 그는 거기서 유배 중인 나폴레옹을 만난다. 나폴레옹은 아버지의 후배였다. 이런 저런 이야기 끝에 조선 이야기가 나왔다. 배질 홀은 낯선 이방인인 자기에게 조선인들이 얼마나 친절했는지, 그들이 준 술이 얼마나 달고 맛났는지 떠들어 대던 끝에 이런 이야기를 했다. “이 나라는 어찌나 평화를 사랑하는지 긴 역사에도 불구하고 남의 나라를 침략해 본 적이 없는 선량한 민족의 나라라오.” 나폴레옹은 코웃음을 쳤다. 이 세상에서 남의 나라를 쳐들어가 보지 않은 민족이 있느냐며 자기가 천하를 다시 통일한 후에 반드시 그 조선이라는 나라를 찾아가 보겠다고 대꾸했다. 혹시 나폴레옹이 엘바에 이어 세인트헬레나까지 탈출하여 재기에 성공했다면(실제로 나폴레옹을 탈출시키려는 계획이 있었고 성공 가능성도 높았으나 나폴레옹 본인이 계획을 인지하지 못해 실패로 돌아갔다) 어쩌면 19세기 조선은 나폴레옹을 만났을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났더라면 다음 일은 어떻게 진행되었을까. 당시 조선 국왕은 순조였다. 둘의 대화를 가상으로 그려보자.

나폴레옹 : 정말 다른 나라를 쳐 들어간 적이 없는가?

순조 : 사실이다(음, 실은 안 쳐들어 간 것이 아니라 못 쳐들어갔다).

나폴레옹 : 진짜? 리얼리?

순조 : 정말이라니까.

나폴레옹 : (슬슬 집요해지기 시작한다) 그래도 미운 나라는 있을 것 아닌가.

순조 : 없다.

나폴레옹 : 정말?

순조 : ...실은 위에 있는 청나라가 조금 밉다.

나폴레옹 :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껄껄 웃으며) 지금부터 조선과 프랑스는 동맹이다. 내가 대포를 주고 전쟁 기술을 알려줄 테니 미운 놈을 때려라.

그래서 조선은 총력전을 배우고 상무 국가로 거듭나 청을 무찌르고 내친 김에 임진년의 원수도 갚지 않았을까 싶지만 그러나 요기까지만 쓰자. 더 나가면 펜앤 독자들 대체 뭔 헛소리야 짜증내실지 모르니까. 술자리에서 이 이야기를 했더니 다들 재미있어 하는데 하나가 초를 친다. “그럼 뭐 하냐. 나라가 망하게 생겼는데.” 그래서 술자리가 또 우울해졌다. 이럴 때는 힘 있는 건배사로 분위기를 바꿔 줘야 한다. 가령 이런 거. 자유, 진실, 시장, 반공!

남정욱 객원 칼럼니스트(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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