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삼 칼럼] 10월 8일 을미사변의 교훈
[김용삼 칼럼] 10월 8일 을미사변의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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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동맹에서 이탈하여 중국에 줄을 대려는 문재인 정부의 외교 행위는 구한말 민 왕후의 참혹한 실패외교의 완벽한 답습
김용삼 객원칼럼니스트
김용삼 객원칼럼니스트

10월은 기념해야 할 날이 많다. 10월 1일 국군의 날, 10월 3일 개천절, 10월 9일 한글날…. 그렇다면 오늘, 즉 10월 8일은 무슨 날일까?

이 질문을 마주하는 보편적 한국인들은 ①기억나지 않거나, ②잘 모르거나, ③잊고 싶거나, ④관심이 없거나 중 하나의 반응을 보인다. ‘명성황후’로 칭송되는 민 왕후가 일본인들에게 시해 당한 날이니까.

지금으로부터 123년 전인 1895년 10월 8일 새벽의 일이다. 경복궁에 난입한 일본군(경성수비대)과 일본 영사경찰, 공사관 소속 외교관, 그들이 동원한 칼잡이(낭인)와 친일 성향의 조선 훈련대가 고종과 민 왕후의 숙소인 경복궁 건청궁에서 조선 왕후를 살해한 후 시신에 석유를 끼얹어 태워버렸다. 타다 남은 유골은 궁궐 안 연못에 던졌다가 증거인멸을 위해 다시 건져내 후원 소나무 숲에 파묻었다.

이른바 을미사변은 근대 인류 역사에서 국가 간에 벌어진 여러 사건 중 가장 죄질이 무겁고 악질적인 흉악범죄에 속한다. 역지사지(易地思之)로 생각해보자. 만약 영국군이나 러시아군이 도쿄 한복판에서 자객들과 함께 그들 정부 외교관의 지휘 하에 천황이 사는 황거에 난입한다. 천황이 지켜보는 앞에서 천황비를 일본도로 난자하여 살해한다. 그 후 시신을 불태워 없앴다면 일본인들은 어떻게 반응했을까?

일본 정부 책임 숨기기 위해 낭인을 선봉에 세워

이후 일본은 오늘날까지 일본 정부의 개입설을 차단하기 위해 학자와 언론인, 심지어 소설가까지 등장시켜 온갖 변명을 늘어놓고 있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는 없는 법이다. 미안한 얘기지만 일본 정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연구자들의 연구에 의해 진상을 거의 파악하게 되었다. 왕후 시해의 행동대를 지휘한 것은 조선 주재 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였고, 그 윗선에 일본 군부와 일본 정부가 있다는 사실을.

미우라 공사는 서울공사관 외교관들의 지휘 아래 서울 주둔 일본군(경성수비대)을 동원하여 왕비를 시해했다. 일본군이 시해한 것이 알려지면 외교 문제로 비화될 것을 우려하여 서울에 거주하는 칼잡이 자객, 이른바 낭인들을 선봉에 세웠다.

그런데 왕후 시해에 주범 격으로 참여한 자객 낭인들의 이력을 보면 이들은 행동만 앞세우는 단순 무식한 깡패 혹은 칼잡이 무뢰배가 아니다. 미우라 공사의 개인적 정치 고문이었던 시바 시로(柴四郎)는 미국 하버드대학과 펜실베이니아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도미 유학생 출신이었다.

낭인 두목 아다치 겐조(安達謙蔵)는 조선에서 발행되는 일본어 신문인 한성신보 사장이다, 그는 정치에 입문하여 중의원 14선을 기록하면서 ‘선거의 신(神)’으로 불렸고, 체신대신, 내무대신을 역임했다. 이밖에도 종군기자로 조선에 와서 『조선왕국』을 집필한 기쿠치 겐조(菊池謙讓) 등 고급 지식인들이 많았다.

이런 면면을 보면 일본 낭인들은 칼이나 휘두르는 직업적 정치깡패가 아니라, 고도로 의식화 된 지식인 테러리스트였다는 평가가 가능하다. 이런 인간들을 무뢰배 내지 깡패 정도로 비하한 것은 무뢰한들이 술에 취해 저지른 하찮은 소란쯤으로 사건의 의미를 축소하기 위한 일본 정부의 마타도어였다.

하지만 을미사변에 대한 이런 방식의 접근법은 왕후를 ‘어떻게’ 시해했는가에 초점을 맞춘 연구의 결과물이다. 하지만 ‘어떻게(how)’보다 더 중요한 것이 ‘왜(why)’다. 대체 일본은 왜 한 나라의 왕비를, 그것도 왕궁 한복판에서 끔찍하게 살해했을까?

일본도 메이지유신 이래 근대국가로 탈바꿈하면서 최소한의 국가 이성이 존재하는 나라가 분명했다. 그런데 을미사변 같은 ‘천인공로 할 만행’을 국가 차원에서 기획․실행한 이유는 무엇인가? 또 당시 조선의 국왕은 고종이었는데, 왜 하필 가냘픈 여성을 살해했을까?

청일전쟁의 전리품 토해낸 일본

일본은 1895년 5월 5일 청일전쟁에서의 승전보가 메아리치기도 전에 러시아가 주도하는 삼국간섭에 의해 전리품으로 획득한 랴오둥(遼東)반도를 반환했다. 게다가 러시아는 “조선의 독립 보장”을 함께 요구했다. 일본이 청일전쟁을 일으킨 이유는 청나라와 종속관계인 조선을 청국으로부터 끊어낸 다음 일본의 보호국으로 만들기 위함이었다. 이 목적마저 상실되면 대체 일본은 전쟁을 왜 했는가를 절망해야 하는 상황이 된다.

일본 정부는 랴오둥반도 환부 결정에 이어, 조선에 대한 간섭을 중지하고 조선을 자립시키기로 결정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참전 군인들은 “우리가 목숨 걸고 싸워 획득한 전리품을 외교전 패배로 인해 빼앗겼다”면서 100여 명이 할복자살하는 등 전국이 초상집이 되었다.

청일전쟁이 끝난 후 러시아는 동아시아에서 태풍의 눈이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러시아는 19세기 후반 괄목할만한 산업 성장을 기록했다. 1890년대 러시아의 제조업과 광업은 매년 8퍼센트, 1907년에서 1914년까지는 연평균 6퍼센트의 성장률을 기록했다. 1890년부터 1913년 사이 러시아의 곡물생산은 35퍼센트 증가했다. 이 시기 러시아는 밀과 호밀 생산량 증가에 힘입어 세계 최대의 곡물 수출국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 5년 전까지 러시아의 곡물 수출은 연평균 1,150만 톤에 달했다.

이러한 산업혁명 및 농업혁명을 바탕으로 러시아는 모스크바와 블라디보스토크를 연결하는 9,300㎞의 시베리아 황단철도 건설에 도전했다. 1891년 5월 19일 러시아 황태자 니콜라이가 블라디보스토크의 제방에 자갈을 쏟아 부은 이래 시베리아 횡단열차는 서부와 동부 종착역에서 동시에 공사가 착공되었다. 그 결과 1897년 2월 중부 시베리아의 예니세이 강변에 위치한 도시 크라스노야르스크까지 철도가 완성되었다.

청일전쟁 이후 일본은 조선을 둘러싸고 중국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강력한 국력을 보유한 러시아와 격돌해야 했다. 이제 청일전쟁의 목적, 즉 조선의 보호국화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러시아와의 한 판 전쟁은 피할 수 없었다. 하지만 러시아는 일본이 상대하기에는 너무나 버거운 대국이었다.

시모노세키에서 강화회담이 막바지 진통을 겪던 1895년 4월,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 육군상은 “이익선을 보다 넓혀 동양을 제패한다”는 슬로건 하에 사단 편성을 1.5배로 늘리고, 사단을 전략 단위로 운영할 수 있도록 개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삼국간섭은 일본 군부의 군비 확장론에 기름을 끼얹었다. 랴오둥반도를 내놓지 않으면 즉시 일본 본토를 공격하겠다고 협박 당한 일본은 이때부터 10년 간 와신상담(臥薪嘗膽), 절치부심(切齒腐心)을 국가 슬로건으로 내걸었다.

일본 정부 관계자들은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하기까지 10년 세월 동안 러시아를 가상적국으로 설정, 대대적이고 급속한 군비확장에 나섰다. 일본은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군비 확장, 군사력 증강에 돌입했다. 일본 국민들은 이러한 군비확장을 광적인 애국심으로 응원했다.

러시아 끌어들여 일본을 물리치려 한 민 왕후

하지만 1895년 10월 당시엔 러시아와 전쟁에 돌입할 수 있는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이 와중에 고종과 민 왕후는 일본을 극도로 자극했다. 러시아의 말 한 마디에 설설 기는 일본의 모습을 보면서 두 사람은 러시아를 “무소불위의 힘을 가진 나라”로, 일본은 재기불능의 시체가 되어 “일본의 조선 지배는 더 이상 어려울 것”이라고 예단했다.

고종과 영민한 왕후는 일본의 ‘조선 보호국화 정책’에 정면 도전했다. 그들이 택한 방법은 또 다시 러시아와 손을 잡는 것이었다. 그 동안 조러 수교(1884), 제1차 조러밀약(1885), 제2차 조러 밀약(1886)을 추진하려다가 민영익이 청나라의 위안스카이(袁世凱)에게 이 사실을 밀고하는 바람에 폐위 위기에 몰렸던 국왕과 민 왕후는 또 다시 영·미·일이 그토록 경계하라고 주의를 준 러시아를 한반도로 초대한 것이다.

민 왕후는 주한 러시아 공사 베베르의 친척으로 조선에 온 손탁을 매개로 러시아와 점점 깊이 엮이게 된다. 베베르의 부추김을 받은 민 왕후는 친러파를 중심으로 국정을 운영하면서 노골적인 배일정책을 추진했다.

민 왕후가 주도한 인아거일책(引俄拒日策)은 한반도에서 본격적인 러․일 대립이라는 걷잡을 수 없는 사태를 야기했다. 그것은 국운을 건 도박이자, 왕후 민 씨의 목숨을 담보한 모험이었다. 틈만 나면 러시아와 손잡으려고 시도하는 고종과 민 왕후의 행보는 정치․외교적 차원뿐만 아니라 심리․정서적 차원에서도 분석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하다.

일본 정부는 “조선에 대한 적극적 간섭을 중지하고 자립 시킨다”는 결의를 통해 조선 보호국화 목표를 포기했다. 이렇게 되자 서울에 체류하고 있던 낭인들은 “일청전쟁으로 조선 반도에서 흉포한 지나(청국) 세력을 물리쳤더니 그보다 더 무서운 러시아를 불러들이는 헛수고를 한 결과가 되었다”면서 들끓었다.

고종은 1895년 5월 13일 친일파의 두목 격인 군부대신 조희연을 파직했다. 7월 9일에는 “지난해부터 시작된 이른바 경장(갑오경장)은 자유 의지가 아니라 일본의 위협과 강압으로 친일파가 시행한 것이므로 칙령이나 재가를 전면 취소할 생각”임을 밝혔다.

이렇게 되자 낭인들은 일본이 조선에서 취할 수 있는 국면 타개 방책은 민 왕후 제거뿐이라면서 “민 왕후를 죽여라!”라고 외치면서 다녔다. 이들의 성난 분노를 잠재우기 위해서는 뭔가 특단의 대책이 필요했다.

하지만 이 세상에 ‘공짜 점심’은 없는 법이다. 러시아를 초대하기 위해 고종과 왕후는 그 동안 청국 보유하고 있던 조선에서의 특권을 지속적으로 제공해야 했다.

그 동안 민 왕후의 인아거일책은 삼국간섭에 굴복한 일본의 약점을 파고들어 실행한 기민하고 빈틈없는 조치였다고 평가되었다. 불행하게도 고종과 민 왕후는 이러한 미국·러시아 정부의 동아시아 정책 목표를 이해할 수도, 알 수도 없었다.

거대한 착각에 빠진 민 왕후

게다가 조선에 주재하는 미․러 양국 공사는 희한하게도 본국 정부의 정책 목표와는 다르게 행동했다. 이런 모습에 현혹된 국왕 부부는 거대한 착각에 빠졌다. 민 왕후의 거일(拒日)은 인아(引俄)와 친미(親美)가 전제되어야 가능한데, ‘인아’와 ‘친미’에서 결정적인 하자가 발생했다.

민 왕후는 ‘거일’을 단행할 수 있을 만큼의 ‘인아’가 조선에서 확고하게 이루어져 있다고 착각했다. 러시아 공사 베베르의 세련된 외교적 친절, 그들 부부의 왕후에 대한 따뜻한 배려, 그리고 “왕실은 계속 보호받게 될 것”이라는 러시아 공사의 확약을 왕후는 철석같이 믿었다.

하지만 왕후는 미·러로부터 구체적 보장을 받은 사실이 하나도 없었다. 그저 실 공사 및 앨런 서기관, 베베르 러시아 공사 부부와의 친분을 그들 정부의 호의라고 확신했다. 이처럼 황당한 상황에서 민 왕후는 미·러 공사의 말만 믿고 ‘거일’ 정책을 추진했다. 미·러의 동아시아 정책을 감안할 경우 인아거일책은 민 왕후가 거대한 착각과 환상에 빠져 저지른 외교적 파탄이란 혹평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민 왕후의 착각과 환상으로 끌어들인 러시아의 한반도 진출 및 일본 밀어내기 전략은 일본의 ‘조선 보호국화’를 파탄 내는 상황으로 전개되었다. 일본 입장에서 볼 때 국운을 걸고 전쟁을 해서 중국을 몰아냈더니, 그보다 훨씬 더 사나운 맹수인 러시아를 안방에 불러들인 격이 되었다.

이 사태를 야기한 몸통은 민 왕후다. 따라서 민 왕후와 러시아의 연결고리를 차단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을미사변은 그 참혹한 결과물이었다.

왕정 체제 하에서는 모든 국사(國事)의 주인공은 국왕이다. 당시 조선 국왕은 고종이었다.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을 물리치는 인아거일 정책도 최종적으로는 고종의 책임에 속한다. 그런데 일본은 왜 고종이 아닌 민 왕후를 희생양으로 삼았을까?

대원군이 신중하게 골라 며느리로 삼은 왕비 민 씨는 간단치 않은 여성이었다. 그녀는 공자가 지은 역사서 『춘추』, 그리고 『춘추』의 주역서인 『춘추좌씨전』, 사마천의 『사기』를 줄줄 암송할 정도로 총명했고, 권력욕이 강했으며, 권모술수에 뛰어났다.

민 왕후를 최초로 만난 서양 여인은 1883년 1월 초 주한 미국전권공사 루시우스 푸트와 함께 입국한 그의 부인 로스 푸트 여사였다. 푸트 여사의 눈에 비친 당시 32세의 왕후는 뛰어난 침착성(masterful poise), 언제나 무엇인가를 탐색해내려는 듯한 눈빛(searching eyes)을 지닌 총명한 여인이었다.

영국왕실지리협회 최초의 여성회원으로서 조선을 여행한 후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을 발간한 이사벨라 버드 비숍 여사는 왕후가 시해되기 직전인 1895년 왕후와 만난 후 “눈은 차갑고 날카로웠으며 그것은 그녀가 훌륭한 지성의 소유자임을 나타내주는 것이었다”라는 인상기를 남겼다.

“사실상의 조선 국왕은 왕비”

민 왕후를 가장 정확하게 묘사한 기록을 남긴 이는 언더우드 부인 릴리어스 홀튼 언더우드(Lillas Horton Underwood) 여사다. 그녀는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가 광혜원에 제2대 부인과 과장으로 파송한 여성 의료 선교사로서 민 왕후의 시의(侍醫)로 활동하면서 왕실의 총애를 받았다. 릴리어스 언더우드의 왕후 관찰기다.

“왕후는 좀 창백하고 마른 얼굴에 생김새가 날카로웠고 사람을 꿰뚫어 보는 듯한 총명한 눈을 갖고 있었다. 첫눈에 아름답다는 인상을 받지는 못했지만 그 얼굴에서 힘과 지성, 그리고 강한 개성을 읽을 수 있었다. … 그녀는 미묘하면서도 유능한 외교관이었다. 대화중에 자신을 반대하는 자들의 허점을 찌르는 재치를 계속 발휘했다.”

민 왕후는 갑신정변 이전인 1884년 중반부터 조선의 대외 문제를 좌우했다. 그 결과 왕후의 대외정책은 조선정부를 대표하는 입장이 되었다. 민 왕후가 러시아를 끌어들여(引俄) 청과 일본을 배척(拒淸․拒日)하려 할 때마다 청과 일본은 대원군을 앞세워 민 왕후를 견제했다. 이것이 대원군과 민 왕후 대결의 큰 줄기였다.

조선 관련 정책을 추진하던 일본인들은 고종을 민 왕후의 손바닥에서 놀아나는 손오공 정도로 평했다. 미우라가 남긴 회고록에 의하면 민 왕후는 “여성으로서는 드물게 재능을 갖춘 호걸과 같은 인물”이라면서 “사실상의 조선 국왕은 민 왕후”라고 평하고 있다. 그의 회고록에 등장하는 내용이다.

“나도 가끔 궁정에 같지만 조선에선 부인이 남자를 만날 수 없게 되어 있으므로, 왕비는 나 같은 사람들도 만날 수 없었다. 처음 한두 번은 국왕의 의자 밑에서 무언가 소리가 나는 것 같았는데, 그것은 왕비의 소리였다. 왕비는 국왕 의자 뒤의 발을 열고 그곳으로부터 입을 열어 국왕에게 무언가 지시를 하고 있어, 사실상의 조선 국왕은 이 왕비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고종이 왕후의 코치를 받아가며 외국 공사와 대화를 진행하는 장면은 고종실록을 비롯한 우리나라의 역사 기록에는 전혀 등장하지 않지만, 이노우에 가오루의 알현 장면에서도 발견된다. 이노우에 공사는 고종을 면담할 때 늘 내알현(內謁見), 즉 신하를 배제시키고 국왕과 직접 대화했다. 알현 시간도 평균 5시간 이상이었다. 이노우에의 고종 알현기는 다음과 같다.

“이노우에 공사 재임 중에도 동 공사가 이태왕(고종)을 알현할 때에는 언제나 발 뒤쪽에 있는 방에 민비가 있어 여러 가지로 국왕에게 주의, 충언을 하고 있었는데 드디어는 발을 두세 치 열어 얼굴을 절반 정도 내밀고 담화를 하게 되었다. … 그 우아한 자세 안에 무한한 권모술수를 숨기고 소위 암탉이 새벽에 우는 일을 맡았다는 말처럼, 즉 아내가 남편의 할 일을 가로막아 자기 마음대로 해 동아(東亞)의 대국을 그르치려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일본은 오랜 기간 동안 공을 들이고, 또 국운을 걸고 청일전쟁이라는 메이지유신 이래 최대의 대외전쟁까지 치러가며 가까스로 한반도의 지배권을 확보했다. 삼국간섭으로 모든 계획이 물거품이 되자 일본은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된다. 게다가 청․일의 대립으로 진행되던 동아시아 질서는 전 지구적 차원에서 ‘그레이트 게임(great game)’을 벌이고 있는 영․러의 대립구도에 휩쓸리게 되었다.

일본의 을미사변 도전에 러시아는 아관파천으로 응전

이 과정에서 영국을 대신하여 일본이 러시아와 대결하게 되면서 한반도에서 러․일 대립구도가 전개된다. 하필이면 이 긴박한 와중에 고종과 민 왕후는 조러 수교, 제1․2차 조러밀약을 추진하다가 폐위 위기까지 몰리게 된다.

청일전쟁 후 러시아의 말 한 마디에 일본이 꼼짝 못하고 랴오둥반도를 반환하는 모습을 지켜본 민 왕후는 또 다시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을 내치고자 했다. 서울 주재 일본공사관은 조선이 또 다시 러시아로 기울어진 것은 왕후 민 씨의 계략 덕분이라고 파악했다.

외세는 왕후와 대원군의 갈등을 절묘하게 이용했다. 왕후는 러시아를 끌어들여 청의 압제에서 벗어나려 했고, 청일전쟁 직전부터는 러시아에 더욱 접근하여 일본을 견제하는 선봉에 섰다. 왕후는 외세 가운데 일본 견제에 누구보다 입장이 확고했다. 하지만 러시아의 침략성에 대한 경계는 소홀했다.

따라서 민 왕후 시해는 술 취한 낭인들의 우발적인 살인사건이 아니라, 한반도 지배권을 다투던 일본과 러시아의 국익이 걸린 간접적 승부였다. 러․일이 한반도 지배를 둘러싸고 각축을 벌이는 와중에 서로가 전면전을 벌일 수 없는 형편에서 일본이 러시아와 조선왕조의 연결고리인 민 왕후를 제거한 것이다.

러시아가 민 왕후 시해로 도전하자 러시아는 얼마 후 국왕 고종을 러시아 공사관으로 탈출시키는 아관파천(俄館播遷)으로 응전한다. 이것이 123년 전 오늘 발생한 민 왕후 시해사건의 역사적 사실(historical fact)다.

을미사변에서 잊지 말아야 할 교훈이 있다. 동맹을 잘못 선택하면 패가망신, 국가멸망에 이른다는 사실이다. 세계사의 주류세력인 패권국 영국이 아니라, 패권에 도전하는 비주류 국가 러시아와 손잡으려 했던 민 왕후와 조선. 123년 후로 시계바늘을 돌리면 영국은 미국, 러시아는 중국으로 바뀌어 있다.

세계사의 주류세력과 손잡은 한미동맹에서 이탈하여 비주류 패권도전국인 중국에 줄을 서려는 문재인 정부의 외교 행위는 구한말 민 왕후의 참혹한 실패외교의 완벽한 답습이다. 그 말로가 어땠는지 문재인 정부는 ‘10월 8일’의 교훈을 잊지 마시길 권한다.

김용삼 객원 칼럼니스트(박정희기념재단 기획실장/전 월간조선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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