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 2차대전 등에서 강대국 외면해 실패했던 경험에 武士 사회 특유의 大勢 존중 분위기
외교 안보에선 자존심과 감정보다 철저히 국익 위주 택해
日국민이 ‘굴욕 외교’ 지지하는 이유는 자존심, 감정보다 국익이 우선하기 때문
남북정상회담 후 급증한 文대통령 지지도...북핵문제에 감정적으로 반응하는 韓國人

홍찬식 객원 칼럼니스트
홍찬식 객원 칼럼니스트

일본의 한 대학에서 방문연구원 자격으로 1년간 도쿄에 체류한 적이 있다. 평소 일본에 대해 궁금한 것 중 하나는 왜 일본은 미국에 그토록 고분고분하거나 때론 비굴한 태도를 보일까 하는 점이었다. 최근 3연임에 성공해 일본 정계에서 최장수 총리를 예약한 아베 신조 총리는 외국 언론으로부터 ‘트럼프의 충실한 조수’, 심지어 ‘미국의 애완견’이라는 조롱 섞인 평가를 받는다. 그는 미국의 요구를 전폭 수용하거나 선제적으로 미국의 입맛에 맞는 조치들을 취하곤 한다. 지난달 26일 뉴욕에서 열린 미일 정상회담에서 미국산 무기를 구매하겠다고 밝힌 것도 그런 사례 중 하나다.

일본에 있을 때 도쿄에서 멀지 않은 요코스카를 여행했다. 주일(駐日) 미 해군기지가 있는 이 항구도시는 ‘미카사 기념함’이 있는 곳이다. 시바 료타로의 소설 ‘언덕 위의 구름’에는 1905년 러일전쟁 당시 동해해전에서 일본 함대의 지휘함이었던 미카사 함의 스토리가 자세히 그려져 있다. 그 미카사 함이 ‘기념함’이 되어 일반 공개되고 있다기에 찾아간 것이다.

이 전함은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뒤 1926년 퇴역해 요코스카 항구에 머물면서 일본의 자존심으로 추앙받았다. 그러나 1945년 일본의 패전 이후 굴욕의 상징으로 전락한다. 승전국 소련은 이 배의 해체를 요구했다. 러시아가 자랑하던 발틱 함대를 전멸시킨 이 배에 뒤늦은 앙갚음을 하려 했다. 미국은 소련의 요구를 절반만 받아들인다. 전함 위의 대포 등을 철거하고 보존하기로 한 것이다.

기념함 내부로 들어가 보니 미카사 함은 부분 철거 후 미군들을 위한 댄스홀로 개조되어 사용됐다고 안내판에 나와 있었다. 우리로 치면 이순신 장군이 왜군을 물리친 거북선을 외국 군대가 놀이배로 사용한 꼴이었다. 일본인들은 밤마다 댄스 선율이 흘러나오는 이 배를 어떤 심정으로 바라보았을까 언뜻 짐작이 되지 않았다.

일본인들의 반미감정은 분명 존재할 것이다. 1945년 8월 미국이 일본에 투하한 원자폭탄으로 1945년에만 히로시마에 14만 명, 나가사키에 7만 명의 사망자를 냈다. 원폭 투하가 없었어도 연합군의 승리는 시간 문제였다. 미군 폭격으로 일본 내 도시 주택은 3분의1이, 건물 공장설비 등 실물 자산은 4분의1이 소실됐다. 전쟁을 일으킨 일본 제국주의의 ‘자업자득’이었지만 감정의 앙금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 법이다.

지난해 11월 미국 트럼프 대통령을 일본에 초대한 아베 총리는 트럼프와 골프를 치며 ‘동맹을 더 위대하게’라는 글씨를 넣은 ‘커플 모자’를 함께 썼다. 물론 일본 측이 준비한 모자다. 저렇게까지 해야 되는가 싶을 정도로 저자세의 극치였다. 두 상황이 겹쳐지면서 혼란스러운 느낌이 든다.

그러나 의문의 실마리는 역사적 배경으로 보면 풀릴 수 있다. 섬나라 일본은 외부 침략을 받은 적이 거의 없는 나라다. 그래도 위기는 있었다. 7세기 당나라와 신라의 연합군이 백제를 멸망시키자 일본 내부는 공포감에 휩싸였다. 당나라가 일본에 쳐들어올 것이라는 소문이 자자했다. 부랴부랴 백제에서 망명해온 기술자들에게 주문해 10여개 백제식 성을 쌓아 대비했고 수도를 해안에서 멀리 떨어진 내륙의 오츠로 옮기기도 했다. 실제 공격은 없었다. 13세기에는 원나라가 두 차례에 걸쳐 바다 건너 공격해 왔으나 가까스로 물리쳤다.

두 번의 위기는 모두 정세 판단의 실패에서 비롯된 것이다. 663년 백제와 혈연 관계였던 것으로 추정되는 덴지일왕은 강대국 당나라를 상대로 백제에 구원군을 보냈다가 백강 전투에서 군선 400척과 4만 명의 군대가 거의 전멸하고 말았다. 이후 당나라가 일본까지 공격할 것으로 예상하고 전전긍긍했던 것이다. 1274년 원나라 침공 때 일본의 실권자는 20세를 갓 넘긴 호조 도키무네였다. 그가 조공 관계를 맺자는 원나라 요구를 거부하고 세계 최강국이었던 원나라 사절들을 모두 죽인 것은 어린 나이와 국제 감각의 부재가 부른 무모한 결정이었다.

아울러 2차 세계대전 때 일본이 최강대국인 미국과 영국을 적으로 돌리고 2류 국가였던 독일과 이탈리아를 파트너로 삼아 파멸을 자초했던 기억은 일본인들의 뇌리에 더 생생하게 남아 있을 것이다.

무사 사회였던 일본의 특성도 반영되어 있는 듯하다. 칼로서 승부를 내는 무사 사회에선 강자와 약자가 곧바로 드러나게 마련이다. 이에 따라 실용주의적 경향이 두드러지면서 대세를 존중하는 쪽으로 사회 분위기가 흘러간다는 것이다. 이런 역사적 사회적 경험들이 강대국 미국 의존과 추종의 저류를 형성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아베 정권 이외의 역대 정권들도 대부분 친미 노선을 견지했다. 민주당 정권이 한 때 미국 일변도 외교를 탈피하겠다고 나섰으나 일시적 움직임에 그쳤다. 근원적 이유는 역시 1945년 패전 이후 국가안보를 미국에 전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크지만 그것만으로는 친미 사유를 설명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이번에 아베 총리의 3연임에 즈음해 일본에서 실시된 여론조사를 보면 아베에게 기대하는 정책 중에 ‘외교안보’를 꼽는 사람들이 많았다. ‘사회보장 정책’ ‘경기회복’에 이어 3위였다. ‘굴욕 외교’로도 비칠 수 있는 일본 외교에 대한 지지가 탄탄한 것은 외교안보 정책에서 자존심과 감정보다는 국익 우선의 노선을 선호한다는 뜻이다. 달리 말하면 외교안보 문제에 그때그때 일희일비하지 않는 성향이 강하다는 얘기도 된다.

한국에 대비해 보자. 북핵 문제를 보면 한국 여론은 훨씬 감성적이고 변동성이 크다. 비핵화에서 별다른 진전이 없었던 평양 남북회담이 열린 뒤 50% 초반에 머물던 대통령 지지율이 갑자기 70%로 급상승했다 북한의 비핵화 약속을 다른 나라들은 믿지 않는데 한국 사람들만 믿고 있다는 얘기가 나온다. 그 끝은 어디일까.

홍찬식 객원 칼럼니스트(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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