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계 카톨릭 교회의 지도자인 교황이 거주하는 바티칸 궁전에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 최고의 화가들 중의 한 사람으로 인정받고 있는 라파엘로 (Raffaello Sanzio da Urbino)가 그리기 시작하여 그의 제자인 줄리오 로마노 (Giulio Romano)가 1520년에서 1524년 사이에 완성했다고 알려져 있는 콘스탄티누스의 기증 (The Donation of Constantine; Constitutum Donatio Constantini)이라는 제목의 유화가 걸려 있습니다.

그림의 왼쪽을 보시면 로마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가 교황 실베스트로 1세에게 무릎을 꿇고 있는데 이는 황제가 교황에게 로마 제국의 서쪽 절반의 통치권을 봉헌하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라파엘로는 서기 315년에 콘스탄티누스가 실베스트로 1세에게 전달하였다고 하는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이라는 로마 황제의 칙령 문서에서 영감을 얻어 위 그림을 구상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라파엘로와 로마노의 이 작품은 그 아름다움과 뛰어난 완성도에도 불구하고 후대의 사람들에게 명화 (masterpiece)로 인정받지 못 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위대한 두 화가들의 사후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이 서기 4세기에 작성된 것이 아니라 서기 750년에서 850년 사이에 위조된 것으로 밝혀졌기 때문입니다.

비록 위조된 것일지라도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은 기독교의 역사에서 절대 잊혀지지 않을 문서이므로 어떤 이유로 후대에 조작되었고 그 위조사실이 세상에 알려지기 전까지 세계사의 진행 방향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되는지 연대기순으로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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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는 서기 313년 밀라노 칙령을 발표하여 로마 제국 내에서 기독교를 공인하였다. 서기 324년에는 니케아 공의회를 열어 삼위일체설 (The doctrine of the Trinity)을 채택하고 예수를 인간으로 보는 아리우스파 (Arianism)를 이단으로 선포하여 기독교의 정통 교리를 확립하였다.

2. 서기 392년 테오도시우스 1세는 기독교를 로마 제국의 국교로 하였고 삼위일체설을 신봉하는 정통파는 스스로를 카톨릭 교회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의 사후 로마 제국은 콘스탄티노플 중심의 동로마 제국과 로마를 중심으로 하는 서로마 제국으로 분리되었다.

3. 서기 476년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이후 유럽대륙 전체가 대혼란을 겪고 있었다. 갈리아 (현재의 프랑스)에 거주하던 게르만 민족들 중의 하나인 프랑크족은 그 부족장 클로비스가 메로빙거 왕조 (481년 - 751년)를 열고 카톨릭으로 개종하면서 기존 로마제국 주민들의 지지를 받게 되어 서유럽의 주도 세력으로 부상한다.

** 댄 브라운의 소설 <다빈치 코드>에서 메로빙거 왕조는 예수와 마리아 막달레나 사이에서 태어난 여자아이 사라 (Sarah)의 후손들이라고 언급되었으나 이를 입증할 역사적 근거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4. 프랑크 왕국의 재상 카를로스 마르텔은 서기 732년 투르 - 푸아티에 전투에서 이베리아 반도 (현재의 스페인)에서 침입해 온 우마이야 왕조의 이슬람군을 격파하여 기독교 세계의 민심을 얻었다.

** 투르 - 푸아티에 전투의 역사적 의미를 서유럽의 기독교 세계를 이슬람화의 위기에서 구한 역사적인 사건으로 보는 견해와 프랑스에 거주하던 기독교인들이 카를로스 마르텔의 지휘 하에 스페인으로부터 침공해 온 이슬람교도들의 약탈행위를 응징한 사건으로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

5. 마르텔의 아들 피핀은 교황 자카리아의 지원 하에 메로빙거 왕조를 폐하고 카롤링거 왕조 (751년 - 957년)를 개창하였는데 이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 자카리아의 후임자인 스테파노 2세의 요청이 있었음 - 서기 754년 북이탈리아의 롬바르드 왕국을 정복하고 로마 주변의 영토를 교황청에 기증하였다.

6. 서기 726년 비잔틴 제국 (동로마 제국)의 황제 레온 3세가 성상 파괴령 (iconoclasm)을 내리고 이에 대하여 로마 교황 그레고리오 2세가 반발하면서 시작된 동서 교회의 대립 속에서 황제로부터 그 지위를 위협받던 교황 자카리아와 스테파노 2세는 기존의 보호자인 롬바르드 왕국이 이탈리아 전역을 지배할 야심을 드러내자 서유럽의 패자 프랑크 왕국을 새로운 보호자로 선택하였던 것이다.

7. 피핀의 아들 샤를마뉴는 현재의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북부 등을 정복하고 해당 지역의 주민들을 카톨릭으로 개종시킨다. 교황 레오 3세는 서기 800년 12월 25일 프랑크 왕국의 국왕 샤를마뉴를 로마제국의 황제로 선포하고 그 대신 로마 교황이 기독교 세계의 수장임을 인정받는다.

8. 후대에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은 서기 750년에서 850년 사이에 위조된 것으로 입증되었는데 당시 교황이었던 스테파노 2세 (또는 레오 3세)는 이 문서를 통하여 프랑크 왕국의 피핀 (또는 샤를마뉴)에게 자신이 과거 서로마 제국의 영토에 대한 지배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받고 이론상 교황이 황제보다 우위에 있다는 점을 이해시키려고 하였다.

9. 최초로 기독교를 공인하였던 로마 제국의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서기 315년에 내린 칙령의 형식으로 작성된 위조문서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는 자신을 문둥병에서 회복하도록 해 준 하느님의 은혜에 큰 감동을 받아 이교도에서 기독교인으로 개종하기로 결심하고 당시 로마 교구 대주교 실베스트로 1세에게 세례를 받았다.

- 기독교의 5대 교구 중에 로마를 콘스탄티노플, 예루살렘, 안티오크, 알렉산드리아의 나머지 교구보다 우위에 두기로 하고 로마 교구 대주교를 기독교 전체의 수장이라는 의미의 교황으로 부르기로 한다.

- 로마 제국의 동쪽 지역은 황제가 통치하고 서쪽 지역은 교황이 다스리기로 하며 신의 대리인 교황이 인간의 지배자 황제보다 우위에 있다고 인정한다.

10. 당시 프랑크 왕국의 실권자 피핀은 로마 교황의 지원이 없었다면 메로빙거 왕조를 폐하고 자신의 왕조인 카롤링거 왕조를 열 수 없는 상황이었고 그의 후계자 샤를마뉴는 프랑크 왕국이 비잔틴 제국과 동등한 지위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로마 교황이 비잔틴 황제에게 종속되지 않도록 군사적으로 지원하였다.

** 즉, 프랑크 왕국은 자신의 필요에 의하여 로마 교황청을 외부세력으로부터 보호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여기에 더하여 피핀과 샤를마뉴가 문맹이었다는 점까지 고려한다면 어쩌면 [콘스탄티누스의 기증] 따위는 필요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11. 서기 1054년 동서교회의 분열 (The Great Schism) 직전에 로마 교황 레오 9세는 콘스탄티노플 대주교 미카엘 케랄루리오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교황의 비잔틴 황제에 대한 우위를 주장하면서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을 언급하였다.

12. 서기 1077년 성직자 서임권 문제를 두고 신성로마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와 로마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가 충돌하였을 때 교황이 황제를 파면하자 하인리히 4세는 그레고리우스 7세가 머무르고 있던 알프스의 카노사에 찾아와서 사면을 애원한다. 이 사건을 카노사의 굴욕 (Humiliation at Canossa)이라고 부르는데 당시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이 교황의 성직자 서임권에 대한 법적 근거가 되었다.

13. 중세 시대에는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이 위조된 문서라는 사실을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 했다. 이탈리아의 대문호 단테 (Dante Alighieri)는 서기 1304년에서 1308년에 걸쳐 발표한 신곡 (La Divina Commedia) 지옥편 (Inferno)에서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이 교황청이 저지르는 각종 죄악의 시작점이었다고 한탄하고 있다.

"Ahi, Costantin, di quanto mal fu matre, / non la tua conversion, ma quella dote / che da te prese il primo ricco patre!" ("Ah, Constantine, how much evil was born, / not from your conversion, but from that donation / that the first wealthy Pope received from you!")

14.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인문학자 로렌조 발라 (Lorenzo Valla)는 서기 1440년에 발표된 그의 논문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의 허위성> (De falso credita et ementita Constantini Donatione declamatio)에서 언어학적 분석과 역사적 사실 검증을 통하여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이 위조된 것이라고 주장하였는데 주요 논거들은 아래와 같다.

- 콘스탄티누스 1세는 서기 337년 그의 사망 직전에 세례를 받았는데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에는 서기 315년 그가 하느님의 은혜로 문둥병에서 회복되고 나흘 후에 세례를 받은 것으로 적혀 있다.

-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에는 서기 315년에 콘스탄티누스 1세가 콘스탄티노플로 제국의 수도를 옮기면서 로마를 포함한 제국의 서반부를 교황에게 봉헌한 것으로 적혀 있으나 소아시아의 비잔티움에 신도시를 건설하여 완성한 후 이를 콘스탄티노플이라고 부르기로 한 것은 서기 330년의 일이다.

-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에는 로마 제국의 관리로서 satrap이라는 직위가 언급되어 있는데 이는 기원 전 아케메네스 왕조 치하의 페르시아 제국의 태수에 해당하며 콘스탄티누스 1세의 시대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관직이다.

15. 당시의 교황 에우제니오 4세는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의 허위성>의 내용이 모두 옳다는 것을 확신하였으나 그에 따른 혼란을 우려하여 저자에게 그의 논문을 철회할 것을 요청하였다. 로렌조 발라가 이를 거부하자 교황청은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의 허위성>을 금서 목록에 추가하였다.

16. 독일의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 (Martin Luther)는 로렌조 발라를 높게 평가하여 역대 라틴어 학자들 중 최고의 경지에 있다고 언급하였다. 루터가 교황의 무오류성 (Papal infallibility)을 부정하기로 결심하고 1517년 비텐베르크 성당의 문에 교황청의 면죄부 판매를 비판하는 95개조 논문을 게시하는 과정에 있어서 로렌조 발라의 논문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의 허위성>이 상당한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

17. 이후 카톨릭 교회는 루터와 칼뱅이 주도하던 개신교에 대항하기 위하여 자체적 개혁에 착수한다. 마침내 교황청도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은 콘스탄티누스 1세의 시대에 작성된 것이 아니라 후대에 위조된 문서임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게 된다. 바티칸의 사서 체사레 바로니오 (Cesare Baronio) 추기경이 1588년에서 1607년에 걸쳐서 발간한 교회 연보 (Annales Ecclesiastici)에서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의 허위성>에 기록된 로렌조 발라의 주장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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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허위사실을 기록한 문서가 아무리 정교하게 작성되더라도 (시간이 걸리겠지만) 진실은 반드시 밝혀지게 됩니다. 다만, 조작된 문서가 악용되어 후대의 어느 시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인가의 문제는 그 사회 구성원들의 지적 능력과 윤리의식 수준에 달려있다고 할 것입니다.

유태선 시민기자 (개인사업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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