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원순 사망과 관련해 여권 쪽에선 전혀 다른 이야기가 들려오고 있다. 박원순은 목숨을 그렇게 끊음으로써 아내와 딸 두 여인에게는 잘못했지만, 그가 또 한 여인에게 잘못했다고 하는 소리는 아직 증명된 바가 없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그래서 박원순을 무턱대고 비난하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는 이야기다. 하긴 ‘공소권 없음’으로 사건에 대한 수사가 종결됐으니 흑백 간에 그 문제를 국가 차원에서 결판낼 길은 지금으로선 닫혀있는 셈이다.이 틈을 타 여권에선 거리에 많은 현수막을 내걸었다, “박 시장님의 뜻을 잇겠습니다” 어쩌고 운운. 박원순에겐
북한은 남북관계를 전면적으로 폐쇄했다. 탈북자들의 대북 전단 살포가 표면적인 이유였다. 김정은 정권으로서는 자기들의 ‘최고 존엄’에 대한 공격을 체제위협으로까지 간주했을 법하다. 그러나 이게 다였을까? 이게 하나의 계기였을 수는 물론 있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으로는 최근의 동북아 신(新)냉전이라는 국제환경의 변화에 대한 북한 나름의 대응이었다고 할 수도 있다.미-소 냉전 때도 보았듯이, 강대국들이 험악한 냉전, 상호포위, 패권경쟁을 벌일 때 주변 중-소국들로서는 그 세(勢)를 거슬러 제 마음대로 데탕트(긴장완화)를 하려야 할 여지가
보수라 해야 할지, 우파라 해야 할지, 자유민주 진영이라 해야 할지, 대한민국 세력이라 해야 할지, 이름 붙이기에 따라 ‘특정한 딱지’가 붙을 수도 있기에 정말 뭐라고 불러야 할지 난감할 때가 있다. 지금 여기 이 글에선 ‘자유민주 진영’이라 해 두기로 한다. 하나 더 밝혀 둘 것은, 필자는 어떤 개인, 단체, 모임, 조직을 대변하지 않는 순전 개인이란 점이다.이런 전제하에서 화두를 던진다. 미래통합당과 그것을 포함한 광의의 자유민주 진영은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인가? 필자 개인의 의견은 이렇다. 박형준 김형오 김세연
존경하는 동시대인 여러분. 여러분은 제가 만나 뵌 분들일 수도 있고, 아직 한 번도 만나 뵌 적 없는 분들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건 모두가 다 ‘자유로움을 사랑하는 개인들’이란 점입니다. 이 공통분모 위에서 여러분에게 호소하고자 합니다. 이건 정치 칼럼도 아니고 연설문도 아니고, 그저 절박한 자유 개인의 숨넘어가는 절규로 봐주시면 되겠습니다. 지금 무슨 논설 따위가 필요하겠습니까?긴말 안 하렵니다. 자유인들은 전체주의자들이 도발한 내전(內戰)에서 이기기 위해, 또는 살아남기 위해 최후의 성전(聖戰)을 감행해야 합니다. 저
박근혜 전 대통령이 “기존 거대 야당 중심으로 힘을 합치자”고 한 것은 고난 속에서 터득한 자기 억제와 성찰의 표현이었다고 느껴진다. 이건 정치적이거나 정파적인 소감이라기보다는 다분히 인간적인 소감이다. 미래통합당은 어쩌면 박 전 대통령에겐 미흡하고 불만스럽고 야속한 대상일 수 있다. 이럼에도, 그런 개인적인 입장을 억누르고 거시적인 안목에서 그런 대상을 껴안은 데는 박 전 대통령의 그간의 깊은 고뇌가 깔려있다고 보아 틀리지 않을 듯싶다.이에 대한 정치적 분석은 다음 문제다. 우선은 정치보다 더 근본적이라 할 인간적 수양과 정치의
문재인 정권은 그 정체성이 뭔지 한 번도 스스로 정직하게 천명한 적이 없다. 586 운동권도 자신들이 누구인지, 뭘 하려는 자들인지를 외부 세계에 대해서는 단 한 번도 정확하게 고백한 적이 없다. 그저 막연하게 (국회에 출석해서) “나는 젊었을 때 민주주의를 위해 헌신했노라”라고만 했을 뿐이다. 자유민주주의에서 자유란 두 글자를 뺀 채 그저 민주주의라고만 한 것으로 미루어 볼 때 그들이 말하는 민주주의란 일종의 전체주의적 직접민주제 같은 게 아닌가 짐작된다.그러나 1980년대 중반부터 그들 내부의 은밀한 담론과 의식(儀式)이 바깥
사람은 먹어야 산다. 추우면 털옷을 입어야 하고, 더우면 반팔 옷을 입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표 계산 상 보수는 통합돼야 한다. 이 말에 “아닌데, 보수는 분열해야 하는데...”라고 말할 사람은 없다. 그러나 보수는 보수 나름의 일정하고 분명한 가치론적 정체성을 가지고 모여야지, 보수라는 것의 근본이 뭔지 본질이 뭔지도 분명히 하지 않는 채 그저 손쉬운 대로 ‘이념을 떠난 중도실용’ 운운만 가지고 모여라 하는 건, 그렇게 해서 “뭐하자는 건지”를 알 수 없게 만든다.보수는 현 시점에선 1948년의 대한민국 ‘건국의 이유’ 즉 자유
대한민국 국민이 새로 태어나고 있다. 전에 없던 새 국민/시민상(像)이 그것이다. 지금(12월 16일 저녁 5시) 국회 본관 청사 앞에선 수많은 애국 국민/시민들이 한 사람 한 사람 모두가 각성되고 독립된 개개인들로서 모여들어 운동권이 추동하는 영구독재 변혁기도(연동형 비례대표제와 공수처법 강행처리)에 온몸으로, 온 영혼으로 항의하고 있다. 정권의 첨병, 경찰이 이들을 막아서 해산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왜 해산해야 하는가? 불법집회? 그럼 몇 해 전 이른바 ‘촛불집회는 왜 방치했는가?TV 매체들도 ‘촛불’ 때는 하루 종일 밤중까지
중화 제국주의 밑으로 들어갈 것인가, 미국을 비롯한 자유민주 해양 세력과 동맹할 것인가? 이걸 둘러싸고 서울에서는 지금 치열한 사상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이 현실을 재확인하기 위해 최근의 두 사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하나는 시진핑 중공(中共) 당국의 전체주의 1당 독재‘에 저항하는 홍콩 시민들의 자유-민주-인권투쟁, 이에 대한 한국 대학생들의 연대활동(대자보, 토론, 학내시위 등), 그리고 이 연대에 대한 중국 유학생들의 ’업무방해‘가 빚은 충돌이 그것이다. 또 하나는 서울에 있는 인헌고등학교 일부 교사들의 ’사상독재(학생들의 표
10월 19일 토요일의 광화문 광장과 거기서 청와대로 가는 길은 엄청난 국민/시민 레지스탕스(저항군)의 물결로 일렁였다. 조국이 사퇴했다 해서 국민저항이 끝나는 게 아니다. 조국 사태는 이 시대의 거대한 한판 승부의 아주 작은 파편에 불과하다. 좌익을 지지하는 약 30여%를 제외한 대한민국의 절대다수 성실한 국민은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나 자신들이 무엇에 저항해 싸워야 하는지를 깨닫기 시작했다.저항의 대상은 말끝마다 ‘촛불 혁명’을 자신들의 정당성의 근거로 내세운다. 그것으로 혁명을 합법화시킨 것이다. 그렇다면 그와 똑같은 논리로 ‘
셸리가 쓴 시에 ‘학살의 마스크’라는 게 있다. 영문학을 전공하지 않은 필자이지만 감히 번역해보았다.촘촘하고 말 없는 수풀처럼/그대들 조용히, 꾸준히 서 있으라/팔짱 낀 모습이 그대들의 질 수 없는 싸움의 무기일지니/폭군들이 감히 그대들 사이로 말을 달려 들어와/베고 찌르고 망가뜨리고 자른다 해도/너희들 하고 싶은 대로 해보라고 하라/팔짱 낀 채 의연한 눈빛으로/조금은 공포를 느끼되 경악하진 말라/저들의 광분이 스러질 때까지/살육 현장을 고즈넉이 바라보라/저들은 마침내 수치심을 가지고/그들이 있던 곳으로 돌아가리/그때 비로소 흘려진
자칭 ‘진보’ 정부도 역사적 부침(浮沈)의 일반적인 양상에서 예외가 아닌가? 그들은 20~100년 집권을 호언했었다. 그러나 불과 2년여만에 그들의 실정(失政)에 대해 고려대생들과 서울대생들이 촛불을 들었다. 안암골과 관악산 밤하늘에 저항하는 젊음의 청순한 절규가 길게 메아리쳤다. 이튿날인 8월 23일 광화문 광장엔 또다시 ‘휘날리는 태극기’ 해일이 일어났다.필자는 평생을 통해 역대 정권들이 병들고 주저앉는 장면을 지켜보았다. 모든 정권들이 한 때는 다 막강하고 기세등등했다. 다수 국민들의 지지도 확보하고 있었고, 나는 새도 떨어뜨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운동권 정권의 경제정책, 외교정책, 대북정책은 오늘의 시점에서 볼 때 ‘완전 실패작’이다. 탈원전(脫原電)과 수중 보 해체 등 다른 정책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왜 실패했나? 이 거대한 실패의 궁극적 원인은 무엇인가? 이걸 확실하게 드러내 보여야 국민이, 20~30~40대가, 여성들이, 운동권 정권을 지지한다는 40%대 여론이 역사에서 뭔가를 배울 수 있다. 역사에서 배우지 못하는 국민은 보다 나은 미래를 기약할 수 없다.운동권 정권의 경제정책 실패 이유로는 흔히 베네주엘라 식 포퓰리즘, 반(反)기업 발상, 지나
바른미래당 지도부가 12대 11로 운동권 집권 측의 ‘패스트 트랙’을 지지해 그것을 실현시키기로 결정했다. 바미당의 자살 선언이자 좌경화 선택이자 2중대 자인(自認)이었다. 결국 한국정치와 한반도 정치에서 ‘중간’이라는 것은 그럴듯한 허위이자 허구라는 것이 다시 한 확인된 셈이다.한반도에선 이승만이냐 김일성이냐, 미국 등 해양 세력과 한 편이 되느냐 중국-러시아 등 대륙 세력과 한 편이 되느냐, 그래서 대한민국 건국 노선을 지지하느냐 반대하느냐 둘 중 하나이지 그도 저도 아닌 ‘중간’은 없다는 이야기다.‘중간’ 노선이란 가설을 세워
소련이 해체되고 과도기를 지나 다시 푸틴의 권위주의가 등장하는 과정에서 가장 고통을 받은 것은 애꿎은 러시아의 근현대사였다. 권력투쟁은 이데올로기 투쟁이고 이데올로기 투쟁은 역사관과 역사서술 투쟁이이기 때문이다. 소련이 해체되자 러시아 역사학계엔 ”볼셰비키 혁명은 역사의 필연(inevitability)이 아니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레닌, 스탈린 시대를 지배했던 헤겔-마르크스의 역사관을 허무는 작업이었다. 그러나 볼셰비즘이 끝난 시기의 글라스노스트는 오래가지 못했다. 새로운 차르(황제) 푸틴이 등장하면서 러시아 현대사는 다시 푸
미-북 하노이 회담 결렬 후에 있었던 트럼프 대통령의 기자회견은 한 마디로 “영변 핵시설 외에도 우라늄 핵시설이 더 있다는 걸 우리는 안다. 그것도 해체해야만 제재완화 해주겠다고 했더니 김정은이 그건 못하겠다고 해서 합의문 서명을 하지 않기로 했다”는 것이었다.김정은은 결국 미국에 “이것밖에 없다”며 거짓말을 한 것이고, 이에 대해 미국은 “이거 왜 이러시나, 아 어디어디에 우라늄 핵시설 있잖아...?”라고 들이대자 김정은이 할 말을 잃은 셈이다. 속임수의 한계였고, 핵보유국 인정받기의 일단 좌절이었다.트럼프 대통령은 당초엔 국내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