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이 자료는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당시 변호인이 제출한 상고이유서, 그리고 김대중 피고의 자필로 작성한 상고이유(보충)서다. 김대중 피고는 자필 상고이유(보충)서에서 "본인은 전 정치생활을 통해 대한민국과 민주주의를 나의 생명과 같이 사랑했다"면서 "재판부가 사법의 독립과 정의에 입각해 공정한 판결을 내려 역사로 하여금 납득할 수 있는 훌륭한 심판이 있기를 충심으로 기대한다"고 적었다.-----------------------------------------------------------------------
[편집자 주] 이 자료는 1980년 5월 당시 광주에서 제화공이었던 최영철 씨의 광주사태 체험기다. 공수부대원의 가혹한 시위 진압에 분노한 최영철 씨는 5월 19일부터 시위에 가담하기 시작했으며, 5월 21일 오후 3시, 광주공원에서 무기를 지급받고 시민군으로 활동했다. 이 와중에 5월 24일 송암동 효덕초등학교 앞에서 계엄군에게 체포되었다. 최 씨의 검찰진술을 통해 당시 계엄군의 진압과정, 시민들이 무장하는 과정, 그리고 송담동 효덕초등학교 부근에서 광주 시내에서 철수하던 공수부대와 잠복하고 있던 전교사 교도대 병력 간에 오인사격
이 문건은 5월18일 오후 광주에 투입된 당시 11공수특전여단 61대대장 안부웅 중령의 피의자 신문조서 요지다. 안부웅 대대장은 광주에 투입된 이래 계속 시위대에 쫓겨다니다 5월21일 도청 앞에서 포위돼 생사의 기로에 섰고, 시민과 총격전을 벌여야 했던 당시 상황을 적나라하게 증언하고 있다. 안부웅 대대장은 초기에는 “철수하는 31사단 병력에게 실탄을 얻었다”, “전남도청 앞에서 조준사격은 없었다”고 했다가 신문이 거듭되자 “62대대로부터 실탄을 얻었다”, “전남도청 앞 옥상 건물에 대원을 배치해 조준사격을 했다”,
[편집자 주] 이 문건은 1980년 5월17일, 학생들의 시위 격화로 숨 가쁘게 돌아가던 정국에서 군이 정치 전면에 나서야 한다고 결정한 '전군 주요지휘관회의' 회의록이다. 출전은 월간지 '신동아' 1986년 10월호에 게재됐던 것인데 수사 과정에서 검찰 측 증거자료로 활용됐고, 또 안종훈 군수기지사령관이 증거자료로 제출했다. 이날 회의는 오전 10시~15시까지 국방부에서 군단장급(3성 장군) 이상의 육해공군 주요 지휘관 44명이 참석한 가운데 시종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계속됐다.이날 회의에서 주영복 국
이 문건은 1980년 5월18일 새벽에 최초로 광주에 투입되어 유혈 진압을 전개했던 제7공수특전단 33·35대대장의 검찰진술 요지다. 두 대대장은 검찰진술에서 5월18일 광주 투입 첫날 공수부대의 과잉진압이 있었다는 점을 인정했으며, 정웅 31사단장이 공수부대 운용에 있어 미숙한 점이 있었다고 지적했다.-----------------------------------------------------------------------------------------권승만 당시 7공수 33대대장 진술조서(요지) 1996년 1
[편집자 주] 이 내용은 지난 2007년 4월 작고한 고(故) 신현확 국무총리의 육성증언 녹음테이프 내용이다. 신현확 총리는 1979년 10.26 당시에는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으로, 1980년 5월까지는 국무총리로 재직하며 10.26과 12.12, 5.17과 5.18이라는 한국 현대사의 광풍과도 같았던 격류의 한복판에 서 있었다. 이 와중에 신현확 총리는 대통령 시해라는 초유의 비상사태를 맞아 “유신헌법에 의한 대통령 선거를 치러 과도정부를 구성하고, 이 정부에서 헌법을 개정하고 선거를 실시하며, 선거를 통해 구성된 민간정부에
[편집자 주] 이 내용은 지난 2007년 4월 작고한 고(故) 신현확 국무총리의 육성증언 녹음테이프 내용이다. 신현확 총리는 1979년 10.26 당시에는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으로, 1980년 5월까지는 국무총리로 재직하며 10.26과 12.12, 5.17과 5.18이라는 한국 현대사의 광풍과도 같았던 격류의 한복판에 서 있었다.이 와중에 신현확 총리는 대통령 시해라는 초유의 비상사태를 맞아 “유신헌법에 의한 대통령 선거를 치러 과도정부를 구성하고, 이 정부에서 헌법을 개정하고 선거를 실시하며, 선거를 통해 구성된 민간정부에
[편집자 주] 이 글은 1980년 사면 복권된 김대중 당시 국민연합 공동의장이 1980년 3월26일 서울 YWCA 강당에서 연설한 '민족혼과 더불어' 연설 전문으로,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재판 당시 증거물로 제출됐다. 이 연설은 김대중 의장이 1975년 이래 처음 공개된 장소에서 갖는 대중연설이란 의미와 함께 1980년의 시국을 바라보는 김대중 의장의 시국관과 정치참여 의지 등을 엿볼 수 있는 자료다. 이 연설문 원고엔 몇 년만에 처음 대중연설을 시작하는 흥분된 분위기, 그리고 과열된 청중들의 반응 등이 느껴진다.김대중
[편집자 주] 이 문건은 1980년 최규하 정권에서 청와대 민원수석비서관을 역임한 이원홍씨의 검찰 진술조서다. 박정희 대통령이 1979녀 10월 26일 시해되고 1980년 이원홍씨는 1980년 당시 청와대 민원수석비서관으로서 최규하 대통령을 가까이서 보좌하면서 그의 속마음을 누구보다 잘 들여다 볼 수 있었던 인물이다. 이원홍씨는 검찰 진술에서 "1980년에는 불순한 의도를 가진 데모가 많았다." "당시 상황에서는 극약처방이 필요했다."는 식으로 답변했다. 이원홍씨의 진술내용을 통해 우리는 최규하 당시 대통령의 속내를 어느 정도 유추
[편집자 주] 이 문건은 1980년 당시 언론 통폐합을 주도했던 허문도 당시 청와대 정무비서관의 검찰 진술조서다. 1980년 11월 14일 한국신문협회와 한국방송협회는 각각 임시총회를 열고 전국 신문·방송·통신사의 통폐합을 내용으로 하는 ‘건전 언론 육성과 창달에 관한 결의문’을 채택했다. 이것이 이른바 보안사가 주도한 ‘K-공작’이라 명명된 신군부의 배후조종에 의해 단행된 언론 통폐합이다. 언론 통폐합 조치로 인해 중앙지는 7개지에서 6개로 줄었고, 경제지도 2개지로 정리되었으며 지방지는 1도 1지 원칙 하에 14개가 10개지로
[편집자 주] 이 자료는 1980년 광주사태 당시 광주시청 사회과 행정서기로 근무하던 조성갑 씨의 사체 수습에 대한 진술조서다. 조성갑 씨는 노정계 직원이었기 때문에 사체 수습은 본인의 담당업무가 아니었으나 복지계는 물론 어느 누구도 그런 일을 하려 하지 않아 자신이 나서게 되었다고 진술했다. 그는 사체 수습에 나서 광주교도소, 광주고등학교, 광주 동구 대의동 소재 YWCA 등 시내 곳곳에서 사체를 수습했다. 이 과정에서 주민들이 사체가 암매장되어 있을 것이라고 신고한 지역을 답사했으나 대부분은 암매장 사체를 발견하지 못했다고 진술
[편집자 주] 1979년~1980년에 이르는 정치적 격류 속에서 이학봉씨의 존재는 뚜렷한 족적을 남긴다. 날고 기는 이 나라의 세도가들이 그의 호령 한 마디에 영어의 몸이 됐기 때문. 당시 보안사 대공처장 겸 합수부 수사단장으로서 이학봉씨는 정승화 계엄사령관 연행을 건의하고 직접 조사한 장본인이며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김종필 부정축재사건 등 현대사를 뒤흔든 대형 사건을 현장에서 지휘했다. 당시 보안사 5인방이라 불리며 전두환 장군을 도와 5공 창출의 핵심이 됐던 권정달씨의 검찰 진술에 의하면 보안사 5인방 중 전두환 장군의 집권에
[편집자 주] 이 자료는 서울지방검창청이 광주사태 당시 시위 도중 사망한 시민과 경찰관들의 사망 원인을 분석한 자료다. 자료를 분석해 보면 사망 원인 중 M16에 의한 사망자가 96명으로 가장 많고, 카빈 소총에 의한 사망자도 26명이나 되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카빈 소총은 시민들이 예비군 무기고를 부수고 무장을 한 것이다. 따라서 카빈 소총에 의한 사망자는 시민군의 총격, 혹은 오발에 의한 사망으로 추정된다. 광주사태 진행 과정에서 민간인 사망자가 발생하기 시작한 것은 5월 19일부터다. 이날 2명의 시민이 타박사로 사망했다.
[편집자 주] 이 자료는 1980년 5월 광주사태 당시 서울대 총학생회가 조선대 학생들의 유인물을 입수하여 5월 25일 서울시내 일원에 배포한 것이다. 서울대 총학생회는 유인물을 입수한 후 “이 글은 광주에서 벌어진 처참한 상황을 직접 목격한 조선대 학생이 인간으로서는 차마 논뜨고 볼 수 없는 참상을 서울시민들에게 알리기 위해 사선을 뚫고 가지고 온 유인물을 본 학생총회에서 편집한 글입니다”라고 설명을 달아 서울시내에 뿌렸다. 하지만 이 유인물이 어떤 경로를 통해서, 누가 작성한 것인지 등은 밝히지 않았고, 또 자신들이 편집한 내용
[편집자 주] 이 자료는 1980년 5월 광주에서 무장 시위대로 활동하던 김유○ 씨의 피의자 신문조서 요약 내용이다. 광주시민 김유○ 씨는 1980년 5월 광주에서 시위가 발생하자 친구를 찾으러 시내에 나갔다가 시위에 가담하게 되었다. 김 씨는 시위에 참여한 이유에 대해 “총을 들고 시위를 할 때, 고물상에서 일할 때보다 훨씬 자유스럽고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힘이 생겨 주위의 데모대와 함께 어울려 계속 데모를 했다”고 답했다. 그는 또 무장을 하고 다니다가 오발 사고를 내서 35세 가량 된 청년을 중태에 빠뜨린 내용이 신문조서에
[편집자 주] 이 문건은 5공 창출의 주역 중의 한 사람이었던 허화평 당시 보안사령관 비서실장의 1차 피의자 신문조서다. 권정달씨의 검찰 진술에 의하면 허화평, 그리고 허삼수 보안사 인사처장, 이학봉 보안사 대공처장 등은 모두 하나회 회원들로서 이들이 '전두환 집권의 삼두마차'이며 그중에서도 허화평 비서실장이 삼두마차의 리더였다는 것이다. 허화평씨는 검찰에서 "당시의 모든 정치적 조치들은 최규하 대통령의 재가를 거쳐 실행된 것인 만큼 법적으로는 하자가 없다."고 주장했다. 또 김대중씨를 대표로 한 세력들이 최규하 정부
[편집자 주] 이 문건은 1979년 12․12 사태 다음날 신군부의 조종에 의해 정승화 후임으로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에 임명된 이희성씨의 검찰 진술조서 일부다. 당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전두환은 계엄사령관인 이희성 씨에게 결재를 받은 일은 거의 없다고 한다. 군 인사 등 일반 업무는 측근인 노태우나 정호용을 통해 직접 예하부대에 지시했고, 계엄사령관이 발령하는 포고령도 보안사 요원들이 알아서 발령했다는 것이다. 그는 또 전두환이 관사를 도청하지 않는가 불안해하기도 했으며, 심지어 1980년 초에 참모총장을 그만 두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