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에 동학에 대한 신기루가 횡행하고 있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급기야 서울 종로 한복판에 전봉준 동상이 건립되었다. 이 동상이 서게 된 계끼는 2016년 8월 박원순 서울시장이 전북 전주의 동학혁명기념사업 관계자들을 만났는데, 이때 동학 지도자 전봉준이 순국한 자리에 동상을 세우자는 제안을 수용하면서 동상 건립 작업이 본격화됐다. 이때부터 국민 성금 2억 7천만 원을 모았고, 동상은 원로 조각가 김수현 충북대 명예교수가 제작했다.지난해 4월 24일 종각 맞은편 영풍문고 앞에 세워진 전봉준 동상은 일본영사관에서 조사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으로 세상이 뒤집어졌다. 소위 ‘진보적 학자’로 불리는 손호철 서강대 교수는 박근혜 탄핵을 몰고 온 광화문 일대의 촛불시위를 ‘11월 시민혁명’이라고 정의했다. 시민들이 단순히 박근혜 퇴진을 넘어 헬조선 탈피 등 보다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했다는 점에서 단순한 항쟁이 아니라 ‘시민혁명’이었다는 것이다.손 교수는 『촛불혁명과 2017년 체제』라는 자신의 저서에서 박근혜를 ‘최악의 대통령’으로, 촛불시위에 나선 사람들을 ‘천오백만 촛불이 상징하는 최고의 시민’이라고 자리매김했다. 아직까지는 학문의 자유, 언론출판의 자
문재인 대통령의 ‘친일청산’ 관련 발언이 레드 라인(red line)을 넘었다. 대한민국 건국을 반대한 백범 김구 기념관에서 국무회의를 열지를 않나, “친일을 청산하고, 독립운동을 제대로 예우하는 것이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고 정의로운 나라로 나아가는 출발”이라고 발언했다. 임시정부 출범일인 4월 11일을 임시공휴일로 하려다가 여론이 너무 좋지 않자 슬그머니 폐기했다.심지어 지난 2월 15일 청와대에서 열린 국가정보원·검찰·경찰 개혁 전략회의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일제강점기 검사와 경찰은 강압적 식민통치를 뒷받침하는 기관이었다”며 “
1. 분석의 대상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2017년 12월 16일, 중국 방문 과정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를 방문하여 “임시정부 수립을 대한민국 건국으로 본다”면서 “3·1운동 100주년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고, 그것은 곧 대한민국 건국 100주년”( [중국 방문]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 방문 2017. 12. 16)이라고 연설했다.대한민국 건국일이 1948년 8월 15일이란 사실은 이미 모든 논쟁을 통해 다 밝혀진 주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대통령이 자국의 건국일을 어떠한 법적·제도적·절차적 검증도
I. 건국일 논란“우리는 처신이나 성공의 방법을 알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누구인지 알기 위해서 역사를 배운다.폴란드 역사학자 콜라코프스키의 말이다. 조선일보는 2006년 8월 14일 대한민국의 건국에 관한 국민의식조사결과를 보도했다. 이 보도에 의하면 “대한민국의 건국일이 언제인지 알고 있는가” 라는 질문에 대해 이 나라 국민들은 다음과 같이 답했다([표1] 참조).2015년 8월 19일 여론조사기관인 리얼미터의 광복 70주년 관련 국민의식조사결과는 다욱 흥미로다. “대한민국 건국시점이 언제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국민들의 답변은
대한민국은 반도국가입니다. 반도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태를 묻고 살아야 했던 한민족은 늘 바다를 끼고 살면서도 한 눈으로는 대륙을 바라보아야 하는 중간지대적 속성을 숙명처럼 떠안고 살아왔습니다. 로마가 발흥한 이탈리아가 그랬고, 유럽에 수많은 도시국가를 창조한 그리스가 그랬습니다.이탈리아 중부의 도시국가로 출범한 로마는 유럽의 도시와 도시를 연결하는 로마가도를 건설했고, 해적을 퇴치하고 해상로의 안전을 확보하여 지중해를 자국(自國)의 내해로 만들었습니다. 육로와 해로를 통해 수많은 민족과 국가들이 상호 교류할 수 있는 길을 연 결과
1945년 10월 16일, 33년 만에 미국서 돌아온 이승만의 귀국 일성은 “모든 정당과 당파를 초월하여 한 개의 덩어리로 만들어가지고 우리 한국의 완전무결한 독립을 찾는다는 것이 나의 희망”이었다. 이보다 한 달 여 뒤인 같은 해 11월 23일 김구의 귀국 일성은 “혼이 돌아왔는지 육체까지 가지고 돌아왔는지 그저 꿈인지 생시인지 잘 모르겠다”였다.1949년 6월 26일,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이끌어왔던 독립운동 지도자 백범 김구는 자택인 경교장(현재의 강북삼성병원 자리)에서 현역 육군 소위 안두희가 쏜 총탄에 맞아 절명했다.이날 6
박정희 집권 18년의 의미-박정희 재임 18년, 한국사에서 ‘예외의 시대’였다일본의 한국 정치 전문가인 다나카 메이(田中明)는 1992년 출간한 그의 저서 『한국정치를 투시한다』에서 박정희 시대를 ‘예외의 시대’라고 명명했다.(다나카 메이(田中明) 저·윤학준 역, 『한국정치를 투시한다-한 일본 지식인이 본 한국』, 길안사, 1995, 10쪽). 그 이유를 다나카 메이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서기 1270년 고려 무인정권의 몰락 이후부터 조선 500년 등 한민족 700년의 역사는 글 읽는 문과(文科)적 지식인을 가장 우대하고 부가가치
[편집자 주] 이 자료는 전남지방경찰청이 발간한 『경찰관 증언과 자료를 중심으로 한 5‧18 민주화운동 과정 전남경찰의 역할』 자료다. 전남지방경찰청 5․18 민주화운동 관련 경찰 사료수집 및 활동조사 TF 명의로 된 이 자료는 1980년 5월 광주사태 당시 전남경찰청 소속 경찰의 활동상황을 정리해 놓았다. 이 자료를 통해 광주사태 당시 광주 일대에서 시위진압에 나섰던 경찰들은 어떤 움직임을 보였는지 이해할 수 있다. Ⅵ. 기 타안병하 경찰국장 면직 처분※ 안병하(28年, 강원 양양) : 육사 8기, 총경 특채, 경무관 승진(’71
[편집자 주] 이 자료는 전남지방경찰청이 발간한 『경찰관 증언과 자료를 중심으로 한 5‧18 민주화운동 과정 전남경찰의 역할』 자료다. 전남지방경찰청 5․18 민주화운동 관련 경찰 사료수집 및 활동조사 TF 명의로 된 이 자료는 1980년 5월 광주사태 당시 전남경찰청 소속 경찰의 활동상황을 정리해 놓았다. 이 자료를 통해 광주사태 당시 광주 일대에서 시위진압에 나섰던 경찰들은 어떤 움직임을 보였는지 이해할 수 있다. 제5회 내용은 ‘군 재진입 후 경찰 활동(5.27~)’이다. 이 자료에 의하면 경찰은 5월 27일 새벽 5시 계엄군
[편집자 주] 이 자료는 전남지방경찰청이 발간한 『경찰관 증언과 자료를 중심으로 한 5‧18 민주화운동 과정 전남경찰의 역할』 자료다. 전남지방경찰청 5․18 민주화운동 관련 경찰 사료수집 및 활동조사 TF 명의로 된 이 자료는 1980년 5월 광주사태 당시 전남경찰청 소속 경찰의 활동상황을 정리해 놓았다. 이 자료를 통해 광주사태 당시 광주 일대에서 시위진압에 나섰던 경찰들은 어떤 움직임을 보였는지 이해할 수 있다. 제4회 내용은 ‘계엄군의 철수 이후 경찰 활동(5.22~5.27)’이다. 이 자료에 의하면 경찰은 5월 21일 도청
[편집자 주] 이 자료는 전남지방경찰청이 발간한 『경찰관 증언과 자료를 중심으로 한 5‧18 민주화운동 과정 전남경찰의 역할』 자료다. 전남지방경찰청 5․18 민주화운동 관련 경찰 사료수집 및 활동조사 TF 명의로 된 이 자료는 1980년 5월 광주사태 당시 전남경찰청 소속 경찰의 활동상황을 정리해 놓았다. 이 자료를 통해 광주사태 당시 광주 일대에서 시위진압에 나섰던 경찰들은 어떤 움직임을 보였는지 이해할 수 있다. 제3회 내용은 ‘계엄군 투입 이후 경찰의 역할(5.18~5.21)’이다. 이 자료에서 전남경찰은 군이 투입된 다음날
[편집자 주] 이 자료는 전남지방경찰청이 발간한 『경찰관 증언과 자료를 중심으로 한 5‧18 민주화운동 과정 전남경찰의 역할』 자료다. 전남지방경찰청 5․18 민주화운동 관련 경찰 사료수집 및 활동조사 TF 명의로 된 이 자료는 1980년 5월 광주사태 당시 전남경찰청 소속 경찰의 활동상황을 정리해 놓았다. 이 자료를 통해 광주사태 당시 광주 일대에서 시위진압에 나섰던 경찰들은 어떤 움직임을 보였는지 이해할 수 있다. 제2회 내용은 ‘5·18 이전 시위상황 및 경찰의 대응(5월 초~5.17)’이다. 1980년 5월 17일까지 경찰은
[편집자 주] 이 자료는 전남지방경찰청이 발간한 『경찰관 증언과 자료를 중심으로 한 5‧18 민주화운동 과정 전남경찰의 역할』 자료다. 전남지방경찰청 5․18 민주화운동 관련 경찰 사료수집 및 활동조사 TF 명의로 된 이 자료는 1980년 5월 광주사태 당시 전남경찰청 소속 경찰의 활동상황을 정리해 놓았다. 이 자료를 통해 광주사태 당시 광주 일대에서 시위진압에 나섰던 경찰들은 어떤 움직임을 보였는지 이해할 수 있다. 제1회 내용은 위 자료 서두에 수록된 강석복 전남지방경찰청장의 ‘5·18 민주화운동과 경찰’이다.이 글에서 강석봉
[편집자 주] 1980년 9월13일에 있었던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1심 당시 사형을 구형받은 김대중 피고는 최후진술을 통해 "모든 것을 하느님에게 맡기고, 죽고 사는 것도 하느님에게 맡긴다"면서, 국민이 바라는 민주주의가 평화적으로 실현되고 국민이 공산 위협으로부터 해방되어 조국 통일이 이룩되기를 바란다는 말로 최후변론을 마쳤다. 육군계엄고등군법회의 재판부는 1980년 11월 3일 김대중의 항소를 기각하고 사형을 선고했다. 1981년 1월 23일 김대중의 형량은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고, 얼마 후에는 20년형으로 다시 감형되었으며, 1
[편집자 주] 이 자료는 서울지검에 제출된 광주 투입 계엄군의 실탄 자급 일시 자료다. 자료에 의하면 5월 20일 21시50분에 광주에 투입된 3공수여단에 실탄이 배부되어 장착했으며, 그로부터 1시간 20분 후인 23시10분에 3공수 16대대가 시위 군중에게 포위된 11대대, 12대대, 13대대, 15대대를 구출하기 위해 실탄을 발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광주사태 최초 투입부대 및 실탄 지급일시-----------------------
[편집자 주] 이 자료는 1980년 광주사태 당시 동아일보 광주주재기자로 활동했던 김영택 씨의 검찰 진술 내용이다. 김영택 기자는 검찰에서 “5월 22일 계엄군의 삼엄한 포위망을 뚫고 나타난 500여 명의 시위대는 신군부 측이 광주 시위를 악화시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들여보낸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김영택 씨의 주장은 확실한 근거에 의한 것이 아니라 진술인의 친지의 미확인 소문을 토대로 한 내용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편집자 주] 이 자료는 1980년 5월 광주 일원에서 시민들이 파출소와 예비군 무기고를 습격하여 총기를 탈취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내용이다. 임채문 씨는 나주에서 트럭을 타고 해남경찰서로 이동, 트럭으로 무기고 철문을 들이받아 부순 다음 M1 소총을 탈취했다. 그는 탈취한 총기를 시민들에게 나눠준 후 집으로 귀가했다고 검찰에서 진술했다.------------------------------------------------피의자 임채문 신문조서(제3회·요약)-------------------------------------------
[편집자 주] 이 자료는 1980년 광주사태 당시 시위진압작전에 투입됐던 김완배 3공수여단 12대대장의 체험기다. 김완배 대대장은 광주 출신으로서 1980년 5월 20일 새벽 광주에 도착하여 시위 진압에 나섰으며, 이후 광주교도소 방어작전 등에 참여했다. 특히 김완배 대대장의 광주 대의동 본가는 광주MBC방송국이 불타면서 집의 일부가 불타는 피해를 당하기도 했다. 이 체험기는 육군본부가 발간한 『역사자료』에 들어 있는 내용으로서, 김영삼 정부 하에서 5.18 특별법에 의해 수사가 진행되었을 때 참고자료로 검찰에 제출된 것이다.---
[편집자 주] 이 자료는 1980년 광주사태 당시 학생수습대책위원회 부위원장으로 활동했던 김종배 당시 조선대 무역학과 3학년 학생의 피의자 신문조서다 자료를 통해 당시 시민군 지도부이 움직임과 학생수습대책위원회의 활동을 엿볼 수 있다. 김 씨는 검찰에서 “계엄군과 계속 대치하고 있으면 광주사태가 전국적인 규모로 확대되어 나갈 것이고, 외국이 여론도 민주주의·인도주의 차원에서 과도정부에 대단히 불리하게 전개되어 4.19의 선례에 따라 과도정부가 전복될 것으로 믿었다”고 진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