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네이멍구(內蒙古·내몽고) 자치구에서 불거지고 있는 몽고어 교육 폐지 방침에 따른 소수민족 몽고인들의 저항이 국제적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네이멍구 전역에서 30만명이 시위를 벌이고 있으며 2만8000여명이 연명(連名)으로 중국 당국에 저항의 뜻을 밝혔다. 몽고인들은 자녀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겠다며 등교 거부 운동을 벌이고 있으며 어린 학생들도 집에서 양과 소를 키울지언정 학교에 가지 않겠다고 울부짖고 있다. 네이멍구의 관영방송국 직원 300여명도 연대의 뜻을 밝혔고 몽고공화국의 동포를 비롯해 전 세계 몽고인 사회가 중국의
왕이 후계자를 미처 지명하지 못한 채 사망하거나 유고 상황이 발생할 경우, 차기 권력자가 등장할 때 까지의 공백기를 말한다. 하지만, 현대 정치에서도 종종 등장하는 것이 공위시대이며, 벨기에에서는 500일이 넘게 정부의 수반이 없는 경우도 있었다.(벨기에는 총선에서 과반을 달성한 정당이 없는경우 종종 공위시기를 맞지만, 그래도 잘 짜여진 행정시스템 덕에 아무문제 없이 국가를 유지할 수 있다)한편 좌파들의 투쟁전략인 진지전을 제시해 유명한 안토니오 그람시는 공위시대에 대해 다른 해석을 내놨는데, 바로 "낡은 것들이 죽어가는데 새로운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임기가 끝나기도 전 자신의 전기(傳記)를 담은 만화책 출간에 비판을 받고 있다. 특히 같은당 김두관 의원이 발간위원장을 맡아 칭찬 일색인 내용으로 제작해 '당대표 우상화' 논란이 일고 있다.발간위원회는 이날 전국 주요 신문 등에 게재된 광고에서 "'대중성이 모자라다' '친화력이 부족하다' '딱딱하고 거만하다'는 평가 속에서도 부끄러움 많이 타고 꼭 필요한 거짓말도 못하는 정치인,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은 진실함에서 나온다는 것을 굳게 믿는 정치인
전광훈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 대표회장은 “혁명을 누가 허락받아서 했느냐”며 예정대로 8.15 국민대회를 진행할 뜻을 밝혔다.대한민국바로세우기운동본부(대국본)를 이끌고 있는 전 회장은 13일 펜앤드마이크 정규재 대표 및 주필과의 대담에서 “4.19 혁명을 허가받아서 했나. 5.16을 윤보선한테 허가받아서 했나. 6.29선언은 누가 허가해줬나”라며 “모든 준비는 끝났다. 나오기만 하면 된다”고 말했다.전 회장이 이끄는 대국본은 오는 15일 정오 서울 종로구 경복궁역 인근에서 대규모 국민대회를 갖고 청와대 방향으로 행진을 할 예정이
6·25 전쟁 동안 결사보국(決死保國)의 의지와 탁월한 부대 지휘로 나라를 구했던 백선엽 예비역 대장이 7월 10일 국민의 곁을 떠났다. 16일 국립대전현충원 안장이 끝남에 따라 공식적인 장례절차는 종료되었다. 그럼에도, 백 장군의 장례는 아직 끝난 것이 아니다. 백 장군은 생전에 원했던 ‘6·25 전우들의 곁’에 묻히지도 못했고, 싸가지 없는 보훈처 직원의 말대로 ‘친일파 파묘법’이 제정되면 대전현충원에서 파묘·이장되어야 할지도 모른다. 좌파들은 대전현충원 안장도 반대한다며 장례행렬을 훼방했다. 대전현충원도 백 장군이 영면(永眠)
조작된 통계가 판치는 나라들통계의 조작은 정부가 국민을 두려워 않고 국민의 마음을 가지고 놀려는 나라에서 자주 나타나는 현상이다. 망해가는 나라는 통계의 결과를 조작하여 알리거나 마음에 드는 결과만 골라서 보여주는 수법으로 사람들을 속인다. 통계 중에서도 믿지 못할 통계의 대명사는 예나 지금이나 중국의 통계이다. 중국에서 대약진운동 때 전국적으로 대대적인 참새잡기, 쥐잡기 운동이 있었는데, 지방정부에서 올라온 보고 숫자를 합쳐보면, 잡았다는 참새나 쥐의 숫자가 전 중국에 존재한다고 추정하는 개체수보다 훨씬 많았다. 식량의 생산 실적
1. 남방정치(南方政治) 모택동은 1965년 11월 12일 북경을 떠나 호북성의 무한과 절강성 항주를 오가며 생활했다. 1966년 7월 18일에야 그는 다시 북경의 땅을 밟게 된다. 문화혁명의 불길이 막 치솟기 시작하던 최초의 8개월 간 그는 북경을 떠나 있었다. 1950년대부터 이미 모택동은 중앙정치가 난마처럼 꼬이면, 훌쩍 떠나 남방으로 가곤 했다. 1953년 12월 모택동은 헌법을 수정한다는 명분으로 항주로 내려가 서호의 빌라에 머물렀는데, 당시 중앙정치는 부주석 고강(高崗, 1905-1954 Gao Gang)과 중공중앙조직부
정규재 펜앤드마이크 대표겸 주필이 다가오는 4.15 총선을 두고 "4.15 총선은 인민 대 국민의 싸움이요, 인민대 국민의 갈등이요, 인민대 국민의 전쟁"이라며 그 중요성에 대해 강조했다.정 대표는 2일 오후 6시 펜앤드마이크 뉴스를 통해 이같이 밝히며 "70년전 6.25 전쟁 당시 세계를 양분했던 두 세계관의 충돌이 재연되는 것이고 리턴 매치를 하고 있는 것"이라고 밝혔다.정 대표는 "그 때 대한민국에서 새로 형성된 국민들이 김일성의 인민, 스탈린의 인민, 모택동의 인민과 싸워 이기지 못했다면 지금의 한국인도 대한민국도 없었을 것
‘중국공산당 바이러스’(CCP Virus)로도 불리는 역병의 진앙지, 우한(武漢)이 있는 중국 후베이성 사람들은 중국 내에서, ‘잠재적 보균자’ 취급을 받는, 편견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중국 당국은 녹색·황색·적색의 세 가지로 분류되는 ‘건강QR카드제(制)’를 실시하면서 녹색 코드를 인증 받은 후베이인들은 자유롭게 전국통행을 허가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정작 베이징은 후베이인(人)들의 입경을 봉쇄하고 있으며 다른 성(省)에서도 후베이인들은 녹색 코드를 제시해도 강제로 격리되거나 쫓겨나기 일쑤다. ‘후베이인이’라는 신분자체가 독일 나치
1. "헬조선"은 어디로?몇 년 전 코리아에선 “헬조선”이란 말이 크게 유행했었다. 세계 10위권의 IT 강국, 세계 최고의 의료보험제도를 갖춘 대한민국을 날마다 "헬조선"이라 외쳐대며 저주하던 사람들은 문정권이 들어서자 곧바로 그 무시무시한 단어를 내다버렸다. 정권 하나 바뀌니까 지옥이 천당이 되었나? 그들은 어떻게, 왜, 그리도 쉽게 입에 달고 살던 “헬조선”이란 괴상한 신조어를 담배 끊듯 딱 끊어버렸나? 하늘에서 만나라도 내려왔나? 모두 복권이라도 맞았나?“헬조선”은 지난 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해 좌파집단이 급조해낸 심리전의 무
어제 일본에 신간서적을 보내기 위해 우체국에 가서 항공우편 발송 신청을 했다. 우한 폐렴 사태로 일본행 항공편이 무더기 결항을 하는 바람에 도착 시간이 한달에서 한달 반 정도 걸린다고 설명한다.직원이 시간이 오래 걸리는데 신청을 하겠느냐 묻는다. 대안이 없는데 어쩌겠는가. 신청을 하고 돌아서는데 왠지 눈물이 핑 돈다. 화물이 이 지경이니 사람은 어떤 핍박을 받고 있을 것인지 안 봐도 눈에 선하다. 한국, 그리고 한국인이 어쩌다 이 지경으로 글로벌 왕따 신세가 되었을까. 참으로 몹쓸 시대에 버려진 느낌이다. 단골 식당에 가 봐도 손님
1. 주석님의 호화열차 1965년 12월 초, 계획대로 요문원의 오함 비판이 전국의 주요 매체를 장식하자 모택동은 유유히 북경을 떠나 상해로 향했다. 이후 8개월 그는 북경에 돌아가지 않은 채로 상해와 장강 이남의 도시들을 오가며 지냈다. 모택동은 원할 때면 언제든 어느 곳이든 불쑥 찾아가서 맘대로 머물 수 있는 특권을 누렸다. 무한, 항주, 광주 등등 전국의 주요 도시에는 모택동만 사용하는 호화 빌라들이 있었다. 항주에 가면 그는 서호(西湖) 부근에 위치한 청나라 거상의 빌라에 머물렀다. 16만 평에 달하는 호화판 저택이었다. 무
1. 왜 다시 문혁인가? 여전히 중국현대사를 찬양하면서 한국현대사를 폄훼하는 사람들이 많은 듯하다. 욱일승천하는 중국의 위상을 살피고 대응할 겨를도 없는데 왜 하필 지금와서 문혁을 들춰내냐 묻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을 위해 중공정부에서 공식적으로 발표한 문혁 피해 관련 통계를 하나만 돌아 보자. 1978년 11월 10일부터 12월 15일까지 북경에서는 중국공산당 제11기 중앙위원회 공작회의가 개최됐다. 모택동 사망 2년 2개월 후, 사인방 체포 2년 1개월 후의 일이었다. 형식상 당시의 국가주석 화국봉(華國鋒, 1921-20
1. “문화혁명 5인 소조”: 모주석의 사전포석 요문원의 “해서파관” 비판은 적의 화약고를 향해 발사된 불화살이었다. 불화살이 사령부의 나무기둥에 꽂혀 불길이 스멀스멀 타올랐지만, 적진의 장수들은 전쟁이 임박했음을 눈치 채지 못했다. 불화살의 발사명령을 내린 장수는 다름 아닌 모택동이었고, 요문원은 그저 밀파한 자객인 셈이었다. 자객의 칼놀림이 위협적이었기에 오함을 보호하기 위해 일군의 지식분자들이 싸움에 나섰다. 피 튀기는 사상투쟁이 시작되었다. 생사를 가르는 “말의 전쟁”(war of words)이었다. 주은래의 압박을 못 이겨
1. 팽진(彭眞, 1902-1997, Peng Zhen)의 저항1965년 11월 초 를 비롯한 북경의 주요언론들은 모두 요문원의 글을 거부했다. 그런 이유 때문에 요문원의 글은 부득이 1965년 11월 10일 상해의 에 실릴 수밖에 없었다. 그 후 거의 3주가 지난 11월 29일 와 에, 11월 30일 에 요문원의 같은 글이 게재됐다. 그 20여일의 시간 동안 무슨 일이 있었을까? 강력한 권력자가 북경의 언론사에 외압을 넣었으며, 북경의 언론사들은 저항하고 있었음
1. “대반란의 기획” 1965년 11월 30일 에 실린 요문원의 비평 은 문화혁명의 신호탄이었다. 이 한 편 문제의 글로 요문원은 일약 문예계의 기린아로 급부상한다. 그는 이후 모택동의 부인 강청(江靑, 1914-1991, Jiang Qing), 상해의 좌파작가 장춘교(張春橋, 1917-2005, Zhang Chunqaio)와 함께 이른바 "문혁 4인방"의 한 명이 된다. 요문원의 비평문은 개인의 작품이 아니라 치밀하게 기획되고 준비된 "대반란" 수뇌부의 비밀무기였다. 물론 대반란
박종운 '박종운의 자유시민tv' 대표가 21일 페이스북에 는 제목의 장문의 글을 올렸다. '전향운동권 선배' 격인 자유한국당 김문수 전 경기지사의 글 에 대한 호응 차원으로 보인다. 김 전 지사는 앞서 중국공산당 옛 지도자 마오쩌둥(모택동)의 '자유주의 배격 11훈'을 비롯해 좌익운동권들의 자유주의 배격 사상투쟁 및 국가장악 실태를 폭로하고, 4.15 총선 '주체사상파 낙선 국민운동'을
청년시절 노동운동과 좌익정당 활동에 투신했다가 확고한 자유우파로 전향한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자유한국당 소속)가 문재인 정권 출현을 계기로 대한민국이 북한 김일성 주체사상, 공산주의 추종자들에게 넘어가 있다고 호소한 '주사파가 집권한 대한민국?'이란 장문의 글이 큰 화제가 되고 있다. "주사파가 집권한 대한민국? 죽느냐? 사느냐? 이것이 문제입니다"라는 문제 제기로 시작되는 이 글은 중국 공산당 마오쩌둥(모택동) 시대에 만들어지고 좌익운동권 상위 그룹에서 공유해 온 '자유주의 배격 11훈(訓)'을 이 글
1. "수정주의에 반대하라!” 1965년 11월 30일 화요일 북경시내. 최저기온 영하 8도의 싸늘한 기온. 북에서 불던 바람이 슬그머니 남으로 방향을 바꾼 그날. 매캐한 석탄재가 날렸음에도 푸르스름한 하늘빛이 수줍게 드러나는 맑은 날씨였다. 이른 새벽부터 북경시내는 북적였다. 자전거를 타고 가는 청년들, 더운물을 실은 수레를 끌고 가는 노인들, 재잘거리며 등교하는 학생들, 일터로 가기 위해 버스에 오르는 노동자들. 모두가 분주히 바쁜 일상을 서두르고 있었지만,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큰 사건이나 사고는 딱히 없어 보였다. 그날
1. 문화혁명: 대중운동인가? 관제데모인가? 공식적으로 “중국 무산계급 문화대혁명”은 1966년 5월 16일 중공중앙위의 통지가 정부 각 조직에 반포되면서 시작되어 1976년 10월 4일 4인방이 전격적으로 체포될 때까지 무려 10년 동안 전 중국을 혼란, 폭력, 살육, 기근 속으로 몰아넣었던 극단적인 “대중운동”(mass movement)이었다. “대중운동”에 국가공인의 발발과 종결의 시점이 있다는 사실은 지독한 패러독스(paradox)이다. 모름지기 대중운동이란 권력의 부패나 국가의 폭력에 맞서는 인민의 자발적인 저항이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