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9월 미국을 방문한 노태우 민정당 총재가 레이건 대통령과 만나는 자리에서 다리를 꼬고 앉은 자세가 화제가 됐다. 노태우 총재는 귀국해서 “레이건이 꼬길래 나도 꼬았다”고 말해 화제를 이어갔다. 당시만 해도 다리를 꼬고 앉는 것은 일종의 권위였다. 어떤 자리에서 누가 두목인지 알려면 자세만 보면 됐다. 모두 양 다리를 내리고 앉은 무리에서 유일하게 다리를 꼬고 앉은 사람이 있으면 그게 두목이었다. 국회에 출석한 기관장이나 증인이 다리를 꼬고 앉으면 의원들이 호통을 쳤다. 어디 감히 국회의원 앞에서 다리를 꼬냐는 질책에 끝까
이제는 친오빠나 아버지에게도 함부로 애정표현을 하면 안 되는 모양이다. 얼마 전 한 여성 아이돌 가수가 친오빠에게 잘해줬다는 이유로 여초 사이트에서 악성 댓글 폭탄 세례를 받았다. 그녀에게는 ‘흉자’라는 타이틀이 붙었는데 ‘흉자’란 신체적으로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남성의 이익을 대변하며 여성에 대한 억압에 무관심한 여성을 가리키는 ‘명예 남성’을 한 차원 더 비하한 단어로 ‘흉내 자지’라는 의미다. 보통 ‘남성주의 사고방식에 동조하는 여성’ 또는 ‘페미니즘에 동조하지 않거나 비판하는 여성’을 비난하기 위해 사용된다. 남녀갈등에 이어
“우크라이나의 용감한 항전이 세계인의 마음을 움직이고 있다는 가슴 벅찬 뉴스를 보며 몇몇 우크라이나 작가가 떠올랐다.” 얼마 전 신문에 실린 한 칼럼의 첫 줄이다. 그런데 ‘용감한 항전’이 대체 뭐지? 항전 앞에 상황을 수식어로 쓰는 것은 이해가 된다. 절박한 항전, 결사적인 항전, 뭐 이런 건 말이 된다는 말씀이다. 그런데 용감한 항전이라니. 그럼 안 용감한 항전도 있단 말인가. 그럼 반대말은 비겁한 항전인가. 대체 왜 항전의 가치 판단까지 하는지 알 수가 없다. 용감한 항전까지는 그렇다 치자. 그런데 대체 그게 왜 ‘가슴 벅찬’
2020년 개봉한 ‘남산의 부장들’은 참 재미있는 영화다. 정치와 권력을 만지면서 나름 팽팽하게 긴장감을 유지하던 영화는 뒷부분에서 갑자기 김재규가 ‘Mission: Impossible’의 톰 크루즈 흉내를 내면서 액션물로 바뀐다. 다큐가 예능이 됐고 극장 안 여기저기서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감독이라는 인간들은 가끔 영화적 상상력을 허구적 거짓말과 착각한다. 비어있는 부분을 개연성 있게 채워 넣으라는 얘기지 아무 말이나 지껄이라는 혹은 맥락 없는 거짓말을 하라는 얘기는 아니다. 일정 시대를 다룬 ‘밀정’이나 ‘봉오동 전투’를
나라마다 건국 설화가 있다 대부분은 신화의 세계에서 형제가 서로 죽이거나 혹은 남매가 사통하는 등 인간의 눈으로 보면 막장이거나 유혈낭자다. 반면 우리의 건국은 세계사적으로 독보적이다. 동굴에 처박혀 쑥하고 마늘 먹기 시합을 해서 이긴 쪽이 하늘의 아들과 혼인한다. 경쟁은 있었지만 살상은 없었다. 단군 이야기는 ‘삼국유사’를 통해 알려졌지만 일연의 창작물은 아니다.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전해 내려오던 이야기를 일연이 다듬었다. 우리나라 뿐 아니라 대부분의 건국 설화는 전래민담이 기원이다. 이 건국설화를 아예 창작한 나라가 있다. 고
잘 웃던 어머니를 닮아서인지 나는 웃기도 잘 하고 웃기기도 잘 한다. 술 마시는 자리는 물론이고 심각한 회의나 심지어 장례식장에서도 나는 참 잘 웃겼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입을 닫고 있었다. 나이 먹고 침통해져서가 아니다. 표현과 단어 선택 때문에 머뭇거리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웃음은 타이밍이다. 대화 사이와 끝에 재빨리 치고 들어가야 그게 웃음으로 연결된다. 웃기는 기능이 그나마 작동하던 몇 년 전 술자리였다. 겨울이었는데 얼마 전 어머니를 잃은 친구 하나가 갑자기 눈물을 터트렸다. “우리 엄마 춥겠다.” 바로 물고 들어갔
냉전冷戰은 반의 반 밖에 안 맞는 말이다. 그 기간 동안에도 열전은 쉰 적이 없다. 미국과 소련은 서로의 영토를 공격하지는 않았지만 대신 제 3세계와 중동에서 피 튀기는 대리전을 치렀다. 군사적으로 상대를 압도했다고 전쟁의 승패는 완결되지 않는다. 진정한 승자가 되려면 경제, 이데올로기, 문화에서 우위를 차지해야한다. 소프트웨어에서도 승리를 거두어야 최종 승자가 될 수 있다는 얘기다. 경제 전쟁이 벌어진 곳은 한반도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라는 체제 우월 경쟁을 미국과 소련은 대한민국과 북한을 통해 벌였다. 결과는 아시다시피 대한민국
여당은 대선 주자끼리 싸운다. 소재의 질은 낮지만 어쨌든 정상이다. 야당은 당대표와 대선후보가 싸운다. 많이 이상하다. 굳이 비유하자면 링에 올라온 선수가 상대방이 아니라 심판과 싸우는 격이다. 심판이 선수와 싸우는 게 아니라 선수가 심판과 싸운다고 순서를 특정한 것은 선수가 먼저 시비를 걸었기 때문이다. “나, 경기 뛰려고 링에 올라온 건 맞는데 네가 심판인 건 알 바 아니야” 선방을 날렸다. 윤석열의 기습 입당이 그렇다. 상식 한참 미달이다. 결심한 지 몇 시간 안됐다고 했다. 결심하는 거랑 입당 절차 밟는 것은 별개다. 내일
유럽인들의 대화는 대부분 문화와 예술로 채워진다. 정치와 종교를 이야기하면 반칙으로 눈총을 맞는다. 유럽인들이 고상해서가 아니다. 정치를 놓고 종교를 놓고 대립하는 세력끼리 하도 죽여서 그렇다. 구교가 신교를 잡아 죽이고 왕당파와 의회파가 살상의 향연을 펼쳤다. 그 피비린내의 잔향이 남아 정치, 종교를 가급적이면 입에 올리지 않는다. 반면 우리는 종교를 놓고 전쟁을 벌인 적도 없고 왕당파와 의회파가 대립하는 시민혁명의 기억도 없다. 잔잔하게 왕조가 망했고 미국에서 돌아온 노老정객이 자유와 민주주의를 일방적으로 주입시키는 바람에 단계
이립(而立)의 야당 당대표를 바라보는 시각은 다양하다. 기대, 불안, 시기, 질투에서 맨 끝으로 가면 적대와 혐오까지 각양각색인데 요약하자면 크게 둘이다. 하나는 국회의원 경험도 없는 그의 등장이 우리 정치의 대변혁을 예고하고 있다는 기대감이다. 둘은 그 기대의 반대편, 그늘이 지는 부분으로 경험 부족에 따른 실수다. 우려하는 목소리는 생물학적 연령이 낮다고 해서 반드시 젊은 것은 아니라는 설명을 덧붙인다. 이 말을 직역하면 못 믿겠다는 얘기다. 경륜 없이 어떻게 대선이 걸린 정치를 끌고 나갈지 모르겠다는 기성세대의 불만 가득한 속
“우리가 정치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우리보다 못한 자들의 지배를 받지 않기 위해서다.” 지난 4년만큼 이 경구를 사무치게 실감한 적도 없다. 그러나 막상 관심을 가지자니 암울해지는 것이 그 대안이라는 존재가 너무나 허술하고 부실하다는 것이다. 어쩌랴. 대선까지 남은 시간은 너무 짧고 정치실험을 할 시간은 턱없이 부족한 것을. 지난 서울과 부산 선거에서 보았듯 거대 양당 정치가 아닌 제 3의 길은 아직까지 요원해 보이는 상황에서 국민의 힘 당대표 선출을 지켜봐야 하는 심정은 복잡하고 심란하다. 하나같이 통합이 어쩌고 정권 심판
나는 일본을 좋아한다. 역병으로 하늘 길 막히기 전에는 일 년에 다섯 번도 간 적도 있다. 왜? 가까우니까. 편하니까. 싸니까. 일본 처음 간 게 30년 전 쯤 되는데 그때는 좀 충격이었다. 약간 과장해서 말하면 미래를 보고 온 느낌이었다고나 할까. 특히 아키하바라 전자제품 상가는 완전히 신세계였다. 일본에서의 첫날 밤 일기장에 이렇게 적었다. “내가 일본을 십 년만 빨리 보고 왔으면 내 인생이 달라졌을 것이다.” 생각이 바뀌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한국은 무섭게 일본을 따라잡았고 아키하바라 수준의 전시장은 이제 우리나라
좌익 진영 인사들이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나라’를 출간했을 때 통쾌하기는커녕 짜증이 났다. 이제 우익은 이런 것까지 빼앗기는구나. 물론 현 정권이 우익만 괴롭힌 건 아니고 전 국민을 달달 볶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애초 타깃은 우익이요 나머지는 콜래트럴 데미지(collateral damage. 부수적 피해)의 성격이 짙은 것 역시 사실이다. 조금 과장되게 표현한다면 가해자 측 일부가 해도 해도 너무 한다며 돌아섰고 그걸 보고 피해자들이 좋다며 박수를 치는 꼴이다. 부끄러웠다. 창피했다. 김종혁이 쓴 ‘두 번 다시 경험하고 싶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은 이임식에서 집 걱정을 덜어 드리겠다는 약속을 매듭짓지 못하고 떠나 마음이 무겁고 송구하다고 했다. 그날 밤 악몽을 꾸었다. 김현미 장관이 약속을 매듭짓겠다며 장관으로 컴백하는 꿈이었다. 전문성은 제로지만 오기 하나만은 충만한 사람이 장관을 하면 어떤 참사가 벌어질 수 있는지 보여준 사례로 김현미라는 이름은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다음 선수인 변창흠은 LH사장 출신이라 조금 나을 줄 알았다. 그는 취임식에서 이전 장관이 했던 일은 다 잘했다며 김현미의 이임사를 무색하게 하더니 수도권 127만 호를 이상 없이
여당의 입법 강행처리를 막지 못했다며 사의를 표명했던 주호영 원내대표가 재신임됐다. 당내 의원들의 대다수 의견이란다. 참 비겁하신 분들이다. 어떤 조직이든 앞날이 불투명할 때 기존 대표를 유임시키는 게 생리다. 반대로 뚫고 나갈, 치고 나갈 방도가 있을 때는 너나 할 것 없이 그 자리를 차지하려 든다. 그러니까 다들 하기 싫은 거다. 마땅한 방책은 없고 욕먹을 일만 기다리고 있는 그 자리 맡기 싫은 거다. 그래서 주호영 원내대표에게 또 떠넘긴 거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주호영 원내대표를 다시 추대하는 자리에서 한 의원은 이렇게
내내 이 정권의 부동산 정책을 조롱하고 비웃었다. 시장을 무시하고 앞일을 하나도 예측하지 않는 무모함 혹은 무식함이 참사를 불러오고 있다고 진단했다. 내 생각이 짧았다. 이 정부의 부동산 정책은 어떻게 해도 이기는 게임이었다. 혹시라도 부동산 시장이 잡히면 정책 성공을 자랑하면 되는 거였고 ‘삑 사리’가 나면 부동산 가격이 올라 세수가 늘어나니 그 또한 싫을 게 없었다. 물론 말은 그렇게 안 한다. 당장은 아니지만 장기적으로 정책 효과가 나타날 것이라고 주장한다. 아마 말하고도 자기들도 안 믿었을 것이다. 부동산 가격 안정은 공급으
어려서 읽은 책 중에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이란 게 있었다. 제목 때문에 읽었다. 제목이 너무 슬펐다. 제목은 그래서 아직도 기억 속에 있다. 얼마 전 이 제목이 다시 떠올랐다. 어떤 남자의 죽음 때문이다. 이 남자의 이름을, 나는 모른다. 그냥 40대 공무원이라는 게 이 남자를 부르는 호칭이다. 이름 대신 사회적 지위와 소속으로 남은 이 남자는 외롭게 죽었고 아마 외롭게 잊힐 것이다. 사건은 간단하다. 북한이 바다에서 대한민국 국민을 사살하고 시신은 태워버렸다. 이후 사과인지 유감 표명인지 알쏭달쏭한 편지 한 장을 달
80년대 초반까지 야간통행금지라는 게 있었다. 자정부터 새벽 4시까지 밖으로 나다니지 못하는 제도였는데 없어지고서야 알았다. 우리가 얼마나 답답한 생활을 했는지, 우리가 얼마나 소중한 네 시간을 빼앗기고 살았는지. 통행금지 직전인 23시 무렵에는 귀가하려는 사람들로 택시비가 따따블까지 올라갔고 대안이 숙박업소뿐인 데이트 족들은 길거리에서 실랑이를 벌였다. 심야에 아픈 사람이라도 생기면 파출소로 뛰어야했다. 경찰이 119를 불러주면 환자와 가족들은 병원을 가릴 엄두도 못 내고 그저 감사했던 시절이다. 그러나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어이
볼수록 싸가지 없는 정부여당이다. 특히 말이 그렇다. 말을 침 뱉듯이 한다. 소변 갈기듯 한다. 말의 품위가 이렇게 떨어진 때가 있었나 싶다. 들을 때는 불쾌하고 곱씹으면 짜증이 난다. 어쩌다 그러는 것도 아니다. 건건이 안 빠지고 한다. 시도 때도 없이 한다. ‘이 달의 개소리’ 차트까지 만들어야 할 판이다. 최근 가장 불쾌했던 게 ‘서울은 천박한 도시’라는 말이다. 서울 시민들 참 착하다. 천사다. 천박한 도시에는 누가 사나. 천박한 인간들이 산다. 졸지에 천박한 인간이 되었는데 참 잘도 참으신다. 천만 명이나 되는 사람 중에
좋았다. 써야 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한 사람도 많았던 모양인데 그런 거 없었다. 어차피 나온 돈이고 그게 누군가의 소득이 된다면 나쁠 리 없다 생각했다. 술 마시는 게 유일한 취미라 반으로 쪼개 한 번은 고기에 한 번은 생선에 술을 마셨다.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했다. 좀 슬픈 얘기다. 글을 쓴다는 것은 궁핍의 시간을 종종, 강제적으로 갖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해서 평소에 광고 전단을 꼼꼼히 들여다보는 습관이 생긴다. 생필품의 평소 가격에 해박하고 그래서 할인판매를 한다면 얼마나 인심 쓴 가격인지 보는 순간 바로 답이 나온다.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