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황희 정승 20대손이다. 어릴 때부터 청백리의 후손으로 명문가 자손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자라났다. 그래서 황희 정승에 관한 미담은 거의 다 알고 있다. ‘계란유골’이란 고사성어까지 이어지는 황당한 얘기도 진위를 의심해 본 적은 한 번도 없다. 잘 알려진 이야기 외에도 황씨 집안에만 전하는 듯한 일화도 있다. 대략 이런 이야기다.황희 정승이 세상을 떠난 후 나랏일을 상의할 원로가 없었다. 그런데 명나라에서 공작새를 선물로 보내왔다. 조선을 골탕 먹이려 공작새가 무엇을 먹는지 알려주지 않았다. 그렇다고 공작새를 굶겨 죽였다가는
모처럼 ‘라떼’(나 때) 얘기 좀 해보자.1980년, 그러니까 내가 대학교 2학년 때의 일이다. 그 전해 10월 26일 박정희 전 대통령이 궁정동 안가에서 시해당한 이후 전국은 어수선하면서도 뭔가 활기를 담은 바람에 둘러싸였다. 그때 불어온 변화의 기운을 당시에는 ‘서울의 봄’이라 불렀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억압과 독재로부터 해방된 것 같은 자유로운 분위기가 느껴졌다는 얘기다. 빨리 계엄을 풀고 새로운 질서를 만들고자 하는 희망 담은 시위가 거리마다 이어졌고 절치부심 기다리던 재야 정치인들을 중심으로 앞날을 어떻게 설계할 것인가
내가 대학교 3학년이던 1981년 얘기다. 그해 봄 대학생 해외 연수가 처음 허용됐다. 젊은이들 듣는다면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얘기냐 하겠지만 그땐 돈이 있어도 외국 여행을 마음대로 다니지 못할 때였다. 외국으로 신혼여행을 갈 수 있게 된 것도 그로부터 다시 10년이 흐른 후였으니 말이다.암튼 난 그때 학보사 편집장이었다. 우린 1학기 내내 대학생 해외 연수가 시기상조임에 대해 수많은 기사를 썼다. 있는 집 자식들과 없는 집 자식들 사이에 위화감이 생길 것이니 허용해서는 안 된다는 논지였다. 우리 신문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대학 신
현대 소설로서 미래를 거의 정확하게 예측하여 화제가 된 두 작품이 있다. 1949년에 발표된 조지 오웰의 《1984》와 1932년에 발표된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이다. 잘 알려진 바대로 소설 《1984》는 쌍방향 모니터 등으로 전체 감시 체계가 갖춰진 상황을 담고 있다. 오늘날 정말 쌍방향 모니터의 개발은 물론, 곳곳에 설치된 CCTV, 위성 카메라, 휴대폰 위치 추적 등으로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이 자신이 아는 것보다 더 정확하게 남에게 노출되고 있다. 또 《멋진 신세계》는 복제 인간이 주류를 이루는 사회에 대해 이야기하고
다사다난했던 한 해. 상투적인 표현 같지만 올해는 이 말이 정말 어울리는 해였다. 맞다. 바로 그 다사다난했던 2020년이 저물고 있다. 게다가 한일합방 110주년, 4‧19의거 60주년, 5‧18민주화운동 40주년, 천안함 피격과 연평도 포격 사건 10주년, 나라 밖으로는 냉전 종식 30주년, 독일 통일 30주년 등, 2020년은 강산이 변한다는 10년 단위 주기를 챙기느라 바쁜 한 해였다. 그 가운데 우리가 절대 빼놓아서는 안 되는 것은 바로 6‧25전쟁 발발 70주년이다.나는 1960년생으로 전쟁이 끝난 지 10년이 채 안 되
소련이 붕괴되기 전까지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이름 앞에는 언제나 ‘반(反)체제 작가’라는 말이 붙어 있었다. 그가 쓴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는 나라 밖에서 소련 강제수용소의 실태를 폭로한 거의 최초의 소설이다.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솔제니친은 전쟁이 끝난 후 소련군 포병 장교로 근무하던 중 친구에게 편지 한 통을 보냈다. 스탈린의 분별력을 의심하는 내용이었다. 그 편지가 발각돼 솔제니친은 1945년부터 1953년까지 8년 간을 강제노동수용소에서 보냈고, 여기에 3년 간의 추방형도 선고받았다. 그는 자신이 실제 복무했던 카자
정부의 고위 관리들과 그 가족들이 심각한 비리를 저지르고 상식에 어긋나는 짓을 하면서도 이리저리 구멍난 곳을 막으려 구차한 변명을 둘러대고 있다. 심지어 그들을 옹호한답시고 또 다른 유력 인사들이 되지도 않는 ‘막말 릴레이’를 줄지어 펼치고 있다. 그런데도 국민의 절반 가까이는 그들을 지지한다. 그들이 잘못하고 있음을 아는 지지자들도 있는 듯하다. 그래도 지지를 거두지 않는다. 그 가장 큰 명분은 “전(前) 정권 사람들은 더 했다”라는 근거 없는 비교다.설사 전 정권 사람들이 부정한 일을 저질렀다 해도 그것을 이유로 부정(不正)과
더위가 가시고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니, 4년이나 지난 2016년, 그 가을의 충격과 상처가 새삼 아픈 기억으로 떠오른다. 그 가을 광화문 앞 세종로를 가득 메웠던, 이른바 ‘촛불혁명’이라는 광풍(狂風)이 일었을 때 내 주변에도 신바람이 나서 날뛰던 사람들이 있었다. 마치, 그 유명한 중국의 소설가 루쉰〔魯迅〕의 《아큐정전》(阿Q正傳)에 나오는, 1백여 년 전 무지몽매한 중국인들을 보는 느낌이었다. 나는 아직도, 4년 전 그들이 했던 말과 그 들뜬 표정들을 모두 기억하고 있다.함께 등산 다니던 한 선배는 “나는 지금 여기 역사의 현장
어디부터 잘못된 것일까? 어쩌다 이렇게까지 되었을까? 어디서부터 어떻게 바로잡아야 할까?우리나라의 역사 교육 현황을 보노라면 이런 한탄이 절로 나온다. 해묵은 얘기 같지만 이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의 기미가 보일 때까지는 들추고 강조하는 것을 멈출 수 없다. 내가 실제 겪은 사례만 봐도 역사 교육의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알 수 있다.몇 년 전, 역사 교과서의 현대사 부분 왜곡에 대한 논란이 한창일 때 일선 학교 교사이던 친구가 의외의 말을 했다. 학교 밖에서는 현대사를 가지고 설왕설래하지만 정작 학교 안에서는 그게 의미가 없다는
소위 ‘코로나19 감염증’이라는 엄청난 재해가 전 세계를 강타하고 있는 올해도 어김없이 여름이 찾아오고 8월이 돌아오고 있다. 우리 민족에게 8월은 매우 특별한 달이다. 1910년 8월29일에는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겨 우리의 주권을 잃었다. 그로부터 36년이 지난 1945년 8월15일에는 그 식민지로부터 벗어나 해방을 맞이하였다. 3년 후 8월15일 우리는 역사상 가장 뜻깊은 날을 맞이하였다.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의 ‘우리나라’를 갖게 된 것이다.모두가 잘 알고 있는 것과 같이 8월 15일은 광복절(光復節)이다. 광복절 제정 당시 이
조선 시대에는 선비들이 수난을 당한 ‘사화(士禍)’가 여러 차례 있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참혹했던 4대(大) 사화는 연산군 때부터 시작되어 중종, 인종을 거쳐 명종 때까지도 계속됐다. 사화의 광풍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 퇴계 이황(李滉, 1501∼1570)과 남명 조식(曺植, 1501∼1572)이라는 조선 최고의 대학자들이 배출됐다.이황과 조식은 같은 해에 태어난 동갑내기다. 이황이 세상을 떠난 지 14개월 후 조식이 그 뒤를 따랐으니, 이들은 명실상부 동시대 인물들이리 할 수 있겠다. 이황은 낙동강 동쪽 예안에서, 조식은 낙동강
6월이다. ‘6월은 호국보훈의 달’이라는 말은 어린 시절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다. 어른이 된 후에도 6월6일 현충일이 오면 반드시 조기(弔旗)를 내걸고 오전 10시 사이렌 소리를 기다려 묵념도 했다. 나이가 어렸어도 나라를 지키느라 목숨을 바친 호국 영령들에 대한 경건함과 진심은 충만했다.올해도 어김없이 6월이 돌아왔다. 어차피 올해 2020년은 ‘코로나19’ 때문에 엉망진창이 돼 버린 해다. 상반기가 끝나가는 지금까지도 사회가 정상화가 안 돼 있는 상황에서 6월의 의미가 정상적으로 표출될 것을 기대한 것이 잘못일까? 심지
우리 역사상 최초로 세계일주를 한 사람은 조선 말기의 관리 민영환이다. 1896년 4월1일 제정(帝政)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 참석을 위해 제물포항을 떠난 민영환·윤치호 등은 중국·일본·캐나다·미국·영국·네덜란드·독일·폴란드를 거쳐 러시아에 이르렀다. 그런데, 돌아올 때에는 시베리아를 횡단하였으니, 지구를 한 바퀴 돈 셈이다. 그중 프랑스어를 계속 배우고 싶었던 윤치호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일행과 헤어져 프랑스로 갔다. 그래서 최초의 세계 일주자 명단에서 빠지게 되었다.그들이 러시아로 갈 때는 조선에서 아관파천(1896
텔레비전 등을 통해 일반 대중에게 노출되는 수많은 약 광고에서는 약의 효능을 자세히 설명하지 않는다. 약효보다는 약 이름 알리는 데 주력하는 광고가 많다. 약 광고에는 특히 여러 가지 규제가 있어 그렇다고도 한다. 그런데 소비자에게 복잡한 성분이나 효능까지 알릴 필요는 없고 그저 약 이름을 외워 약국에 가서 “○○○ 주세요”라고 말할 수 있게만 하면 된다는 전략도 영향을 미친다. 심지어 듣는 사람의 의지와 상관없이 그 약 이름이 머릿속에 각인되도록 반복적으로 약 이름을 강조하는 광고도 있다.사실 소비자의 행동에도 문제가 있다. 소비
1.우리 교과서에서는 인정하지 않지만 백제가 대륙을 다스렸음을 말해주는 기록은 중국의 정통 역사책 여러 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애당초 온조가 세웠다는 도읍 위례성도 한반도가 아닌 중국의 랴오시(遼西·요서) 지방이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문헌에 나오는 ‘하남 위례성’에서 ‘하(河)’는 한강이 아니라 랴오시의 랴오허(遼河·요하)라는 것이다.그러나 상당수의 우리나라 학자는 대륙 백제를 제대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국사 교과서에서도 “백제가 요서에 진출했다”라는 정도로 다루는 데 그치고 있다. 대륙 백제를 인정하지 않는 가장
우리 사회는 말[言]이 말 같지 않은 사회가 되어버렸다. 나는 지금 ‘말’의 한자어를 쓰기 위해 ‘말씀 언’이라는 글자를 자판에서 찾으며 이런 생각에 이르렀다.‘예전과 달리 요즘은 말씀이라는 존칭어를 쓸 만한 말이 없어졌다.’예전처럼 어른을 공경하는 분위기도 아니니 어른 말이라 해서 무조건 ‘말씀’으로 받들지도 않는다. 제대로 된 존댓말을 배우는 것은 물론 가르치는 것에도 뜻을 두지 않기에 이 말은 더욱 쓸모가 없어진 듯하다.말은 사회 현상을 통해 만들어지기도 하지만 말이 사회를 변화시키기도 한다. ‘다르다’와 ‘틀리다’의 혼동이
1.대한제국의 고종 황제 때인 1905년 11월 17일 한일협상조약이 체결되었다. 이른바 을사늑약이다. 놀랍게도 이 중요한 조약이 맺어지는 과정에 대해서 실록에는 별다른 기록이 없다. 다만 그 다음 날부터 쏟아져 들어온 상소문들과 고종 황제의 비답으로 당시의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거의 모든 상소문의 내용은 조약을 무효로 만들고 체결에 참여한 대신들을 처벌하라는 내용이었다. 고종은 그 수많은 상소에 대해 대충 다음과 같은 비답(批答·임금이 상소문의 말미에 적는 가부의 대답)을 내렸다.“이미 대신들이 올린 차자에 대한 비답
19세기, 전쟁을 치른 프랑스와 독일은 서로 사이가 틀어질 대로 틀어져 있었다. 특히 전쟁에 패하고 배상금까지 독일에게 간신히 물어준 프랑스의 반(反) 독일 감정은 높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청소부가 문서 하나를 발견했다. 군사 기밀이 담긴 문서였다. 문건에서 발견된 암호명 ‘D’. 이내 사람들은 프랑스 육군의 포병 대위였던 알프레드 드레퓌스를 범인으로 지목했다. 그는 유대인이었고 독일계 프랑스 인이었다. 더구나 성의 이니셜은 ‘D’였다.반유대주의와 반독일주의가 팽배한 당시 분위기에서 드레퓌스는 졸지에 군사 기밀을
1825년 12월 14일 러시아에서는 장교들의 반란이 일어났다. ‘데카브리스트의 난’이다. ‘데카브리스트’는, 러시아어에서의 12월인 ‘제카브르(декабрь)’의 미국식 발음에서 온 말이다. 이는 12월의 봉기 가담자들을 말한다.20~30대의 젊은 귀족으로 이뤄진 데카브리스트는 대부분 1812년의 나폴레옹 전쟁에 참전했던 정예 부대 장교들이었다. ‘위대한 애국 전쟁’이라고도 불리는 나폴레옹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이끌어낸 사람들이다. 좋은 가문에서 훌륭한 교육을 받은 이들은 퇴각하는 나폴레옹 군대를 뒤쫓아가 프랑스 파리에 입성하는
독일 작가 호르스트 부르거는 오래 전 이라는 책을 썼다. 그는 1929년 독일에서 태어나 나치 시대를 겪었고 1975년 8월 4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자신의 역작이 된 이 출판되기 1년 전이었다.이 책에는 전쟁 당시 16세였던 아버지에게 전후 세대인 아들이 네 가지 질문을 던지고 아버지가 대답하는 형식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그래서 이 책의 구판 제목은 이었다.작품 속 현재의 아들이 나치에 동조했던 아버지에게 던진 질문은 아래와 같은 것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