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이 문건은 1979년 12․12 사태 다음날 신군부의 조종에 의해 정승화 후임으로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에 임명된 이희성 씨의 검찰 진술조서 일부다. 당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전두환은 계엄사령관인 이희성 씨에게 결재를 받은 일은 거의 없다고 한다. 군 인사 등 일반 업무는 측근인 노태우나 정호용을 통해 직접 예하부대에 지시했고, 계엄사령관이 발령하는 포고령도 보안사 요원들이 알아서 발령했다는 것이다. 그는 또 전두환이 관사를 도청하지 않는가 불안해하기도 했으며, 심지어 1980년 초에 참모총장을 그만 두려고
[편집자 주] 이 자료는 1980년 광주사태 당시 사체 암매장 의혹 장소에 대한 광주지검의 조사결과 보고다. 사체가 암매장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제보가 들어온 지역은 황룡강 주변, 화정동 통합병원 부근 등 11개 지역이었는데, 제보가 들어온 지역을 조사한 결과 근거가 언론이 뚜렷한 근거 없이 보도한 것이거나, 제보자가 막연히 “누구로부터 들었다”는 내용을 근거로 한 것이었을 뿐 암매장의 결정적 근거는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1. 황룡강 주변 ▲출처-광주매일 1995년 12월 28일(5.18 행불자회 간사 김정길 주장 인용)-광주일보
[편집자 주] 이 글은 1980년 5월 봄 광주사태 당시 진압작전에 참여했던 박종규 당시 3공수여단 15대대장의 체험기다. 광주사태가 진압되고 한참 후인 1988년 육군본부는 진압에 투입됐던 계엄군의 지휘관들의 체험기를 요청했고, 육군본부는 이들의 체험기를 묶어 ‘역사자료’로 보관하고 있었다. 김영삼 정부의 5.18 특별법으로 수사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육군본부는 ‘역사자료’를 참고자료로 검찰에 제출했다. 박정규 대대장은 자신이 광주 시내 일원에서 체험했던 내용을 군인 입장에서 담담하게 기술하고 있다. 이 글을 통해 공수부대가 광주에
[편집자 주] 이 문건은 12․12, 5․18 재판 당시 1979년~1980년 격동기에 대통령을 지냈던 최규하 전 대통령의 검찰 진술서 중 일부다. 최규하 대통령은 "본인은 1979년 10월 26일부터 12월 5일까지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같은 해 12월 6일부터 1980년 8월 16일까지 제10대 대통령으로 재직한 사실이 있다"는 내용을 제외하고는 자신이 대통령 권한대행 및 대통령으로 재직하는 동안 경험한 사실에 대해서는 일체 진술을 거부했다. 이로써 1979년 10월 26일 밤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 당시부터 신군부가 집권한
[편집자 주] 이 문건은 12․12, 5․18 재판 당시 1979년~1980년 격동기에 국무총리를 지냈던 신현확 씨의 검찰 진술서 중 일부다. 신현확 전 총리는 검찰에서 "최 대통령은 정승화 총장 연행에 대해 '무슨 일을 이따위로 처리하는가' 하며 대단히 불쾌하고 노한 표정으로 끝까지 재가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노재현 국방부장관이 나타났을 때 더 큰 혼란을 막기 위해 사후 재가를 한다는 뜻에서 결재 시간을 명기했다는 것이다. 신 총리는 신군부의 비상계엄 전국 확대 건의에 대해 결정권자인 최 대통령이 단호히 거부할 것
[편집자 주] 이 문건은 1980년 5월 17일 심야, 신군부 세력에게 연행당한 김대중 전 대통령이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으로 기소되어 수사를 받는 과정에서 자필로 기록한 정치 이력이다. 두 차례의 진술서에는 김대중의 해방 후 활동 행적, 6·25 당시의 인민재판 목격담, 목포에서 인민군에게 체포됐다가 기적적으로 살아난 과정, 좌익사상 문제로 의심받게 된 계기, 미국과 일본에서의 한민통(재일한국민주통일연합) 결성과 관련한 자기고백 등이 기록되어 있다. 이 진술서를 통해 김대중 씨는 "해방 후의 편력에 대해 너무도 사실과 다른 말과 중상
[편집자 주] 이 문건은 1980년 5월17일 심야, 신군부 세력에게 연행당한 김대중 전 대통령이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으로 기소되어 수사를 받는 과정에서 자필로 기록한 정치 이력이다. 두 차례의 진술서에는 김대중의 해방 후 활동 행적, 6·25 당시의 인민재판 목격담, 목포에서 인민군에게 체포됐다가 기적적으로 살아난 과정, 좌익사상 문제로 의심받게 된 계기, 미국과 일본에서의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재일한국민주통일연합) 결성과 관련한 자기고백 등이 기록되어 있다. 이 진술서를 통해 김대중 씨는 "해방 후의 편력에 대해 너무도 사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