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970년생이다. 유신정권에서 태어나서 군사정권을 거쳐 치열한 최악의 입시경쟁을 거친 세대이다. 1988년 이후 대학을 다닌 세대로 운동권세대와 신세대로 이어지는 중간세대이기도 하다. 대학은 장수 끝에 서울근교 미대를 다녔다. 내가 미대를 간 이유는 만화가가 되고 싶었는데 만화학과는 없어서 서양화과로 가서 그림을 배운 후 만화를 그려야겠다는 생각이 있어서였다.내 생각과는 달리 미대의 커리큘럼은 데생이나 페인팅교육이 아닌 철학과 접목된 개념미술위주로 짜여 있었으며 오브제와 영상위주의 작업이 대부분이었다. 포스트모더니즘과 개념미술
2011년 10.26은 오세훈 前시장의 사퇴로 인하여 서울시장 보궐선거가 있었단 날이다. 이 사건을 아직도 잊지 못하는 이유는 이일로 인하여 내 信念(신념)과 상식을 뒤엎은 일이 지금까지 이어져오기 때문이다. 안철수의 서울시장 양보로 박원순이 무소속으로 서울시장 후보가 되었고, 토론과정에서 박원순 후보의 서울대 법대 학력 사칭 및 병역 면제에도 불구하고 정치경험이 없는 무소속 신분으로 한나라당의 나경원 후보를 이기고 서울시장에 당선되었다. 당선 되서는 안되는 사람이 1000만 서울시민의 수장이 된 순간 대한민국의 정치상황은 비정상적
1. 본인의 성장배경본인은 1959.9.8(주민등록상 1960.04.01생)일생으로 대한민국 전형적인 아줌마입니다. 매우 어려운 시절에 태어나서 실제 태어난 날 다르고 출생신고한 날이 달라 이들을 꼭 구분해서 기억해야만 했습니다. 조선말 조상님들이 큰 벼슬을 하여 서울에 거주하다가 다소 많은 땅을 하사 받아 자리 잡은 곳이 경기도 광주시 곤지암읍 인근에서 태어나서 어렵지만 곤지암에서 상업고등학교까지 마칠 수 있었고 학교에서 배운 회계지식을 기초로 하여 직장생활을 하면서 방송통신대학에서 독학을 하며 나름 건전하게 열심히 살아오며 19
1. 인간이 태어나 가장 처음 만나게 되는 사회, 가족. 그런데 그 가족이란 거, 그거 알게 모르게 사회주의적이다. 그래서 인간은 모두 좌익으로 시작한다. 나도 몇 가지 증후를 보였다. “핵의 보유는 제국주의의 침략에 대항하는 약소국의 가장 효율적이며 거의 유일한 방법”, “조선인민민주주의공화국이 합당한 주권에 의거하여, 또한 적법한 국제 절차에 따라 로케트(굳이 icbm이라고 하진 않겠다)의 발사에 성공하였음을 민족의 일원으로서 경축한다.”는 발언으로도 문제가 되었던 신해철의 광팬이었는데, 어느 정도였냐면 그의 집 전화번호를 알아
전국이 달아오르고 있다. 길지 않은 장마 탓에 일찍 시작된 폭염. 무더위에 지칠세라 학교도 온종일 에어컨을 가동하고 있다. 풍족하게 쓰고 있는 에너지! 가격이 저렴하기 때문이다.교과서 단원에 ‘지속가능한 환경에 대한 권리’가 등장했다. 그렇지 않아도 가끔 ‘탈원전’에 대한 스피치를 준비하는 학생들이 있었기에 이참에 설명을 해보자 싶었다.사회실 에어컨을 끄고 학생들을 기다렸다. 교실에서 사회실까지 이동하기만 해도 찜통같은 복도를 지나와야 하는 아이들은 사회실 에어컨을 왜 틀지 않느냐고 원성이 자자했다.“오늘 에어컨 선풍기 없이
미국 역사상 경제적으로 가장 처참했던 재앙이 어떤 한 정당의 정강에 있는 여덟 글자로 설명될 수 있을까? 이 경우에는 그렇다고 할 수 있다.여기에 그 여덟 글자가 있다. 1932년 공화당 정강에 금주(禁酒)에 관한 애매한 강령 바로 뒤의 제2조에 있는 단어들이 그것이다. 즉 “우리는 높은 임금이 (경제를 살린다고) 믿는다(We believe in the principle of high wages).”이것은 허버트 후버(Herbert Hoover) 대통령이 한 말이다. 그가 가장 귀중히 여기는 경제적 신념은 임금이 떨어지게 해서는 안
근주자적 : 붉은색을 가까이하는 사람은 붉은색으로 물들고 먹을 가까이 하는 사람은 검어진다. 소리가 고르면 음향도 맑게 울리고 형상이 바르면 그림자도 곧아진다. [近朱者赤 近墨者黑 聲和則響淸 形正則影直].2018년 대한민국은 붉은색으로 물들고 있다.좌파 정부가 집권한지 만 1년이 되어가는 지금, 대한민국은 그야말로 사사무성 (事事無成) 그 자체로 폐망의 기로에 서 있는 형국이다. 이런 좌파정부 덕분에 나는 일생에 별 관심을 두지 않던 정치에 막 눈을 뜬지도 1년이 되가는 요즘, 사람의 무지함과 그에 따른 분별력의 상실로 선동 당하고
나의 부모님은 한국전쟁 이전 북한에서 태어나신 실향민이시다. 아버지는 지금의 평양 강동군에서 태어나셨고 북한의 기독교 탄압이 심해지자 증조할아버지의 결정으로 몰래 월남하여 강원도 묵호동에서 사시다가 전쟁 후에는 춘천에서 자리를 잡고 어머니와 결혼하시기 전까지 사셨다. 어머니는 함경남도 흥남에서 태어나셨고 흥남철수작전때 메러디스 빅토리호를 타고 월남하셔서 거제도에서 사시다가 전쟁 후 춘천에서 자리를 잡고 아버지와 결혼하시기 전까지 사셨다.이렇듯 나의 부모님은 대한민국이 지금까지 북한과 처절히 싸우고 반공투쟁 해온 역사를 몸소 겪으신
내가 좌파였는지 우파였는지는 정확히 모르겠으나 대부분의 386세대가 그랬던 것처럼 좌파였던 것 같다고 최근에 스스로 진단을 내렸다. 지금은 50대 중반으로 586이 되었는데 이번 기회에 나의 이념의 흐름을 정리해보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할지 방향을 정하기 위해서 에 응모하기로 했다. 제목이 말해주는 것 같은 드라마틱한 탈출기는 아니지만 좌파성향에서 우파성향으로의 잔잔한 탈출기도 의미가 있을 것 같다.나는 1962년 충청북도에서 3남 1녀의 막내딸이자 외동딸로 태어났다. 부모님은 과수업에 종사하셨고 동네에서는 우리집을
지금도 가끔씩 떠오르는 기억으로는 초등학교 3학년 때 통일 문제에 대해 선생님과 대화를 한 적이 있었다. 그 때 나는 선생님께 "북한이 너무 못살기 때문에 우리나라가 힘들어지므로 통일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얘기했더니 선생님이 "북한엔 자원도 많고, 군사력도 좋다"며 나에게 설명했다. 그 선생님은 "통일이 되어야 우리나라에 있는 미군을 몰아낼 수 있고 미국은 우리나라를 식민지로 만들려고 하는 놈들"이라고 부연했다. 주위 어른들 중 몇 분도 "미국이 우리나라에 있는 것도 다 자신들이 무기 팔아먹으려고 있는 것이며, 자기들이 우리나
오늘날 수구꼴통이라 불리는 자유민주주의자들이 문재인 정부에 의한 자발적인 적화를 우려하면 자칭 진보적 시민들이 반응하는 말이 있다. “이것이 적화라면 살만하네” 이 말에 자유주의자들은 경악하겠지만 어린시절 학창시절 철저하게 공산주의 교육을 받은 나에겐 퍽이나 친근하게 들리는 소리다. 미국의 식민지라 생각한 대한민국 서울에 대학 공부하러 올라온 내가 자신에게 던진 말이랑 같다. “미국 식민지가 이 정도면 살만 하네” 이 말을 아버지에게 했다가 태어나 두 번째로 뺨을 많이 맞았다.아버지는 1921년 생, 남로당 경남의령 지부장으로 해방
전통적인 인식에 따르면, 문명사회의 전제조건들 가운데 하나는 여러 다양한 직업들에 대해 정부가 면허 제도를 강제적으로 실행하고 있다는 점이다.면허법은 사람들이 특정 서비스를 합법적으로 판매하기 전에 반드시 충족시켜야만 하는 기준(예를 들어 학력 조건)들을 결정한다. 정부는 소비자의 안전과 복리를 위해 이러한 법이 불가피하다고 말한다. 즉 이러한 법이 없을 때보다는 이러한 법이 있을 때 소비자들이 구매하는 재화와 서비스의 질이 높아질 수 있다는 것이다.그런데, 불행하게도 법적 면허제도는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커다란 충격이 되는 실업과
저는 1977년에 서울에서 태어났고 아직까지 서울에서 살고 있는 사람입니다. 중랑 천 뚝방에서 친구들과 뛰어놀며 어린시절을 보냈으며 초창기 전교조 선생님에 의해 국민(초등)학교에서 수업하였고 당시에는 왜 이런 노래를 음악시간에 불러야 하는지 이유도 모른 체 선생님의 오르간 반주에 맞추어 동요대신 개똥벌레를 불렀던 기억이 납니다. 전교조의 참교육이란 구호아래 국정 교과서 대신 별도 인쇄된 종이로 수업을 하였던 기억도 있습니다. 또한 중학교에 올라가서는 수업 현장보다 시위 현장에 더 많이 나가 계시는 분께서 담임 선생님이셨으며 결국 징
하늘이 키 크는 계절 가을, 나의 구름은 하늘에서 내려올 줄 몰랐다. 유난히 바람이 불지 않는 오후였다. 그때도 여지없이 나는 책 한권과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을 들고 나만의 그늘을 찾아갔다. 다른 사람들의 눈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곳, 그리고 나의 말이 들리지 않는 곳. 어린이대공원 구석에 있는 낮은 나무 의자였다.나는 평범한 대학생이었다. 예쁜 여자가 있으면 속으로 고백을 수 십 번씩 하면서 애정표현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하는 녀석이었다. 시험기간이 되면 밤이 새도록 공부하지만, 시험이 끝나는 다음 날이면 다시 아무런 생각
일부러다. 한번씩 기차를 타면 꼭 역방향으로 자리 잡는 사정. 꼼짝없이 내 옆자리에서 같은 방향을 봐야하는 아내는 늘 내 습관을 힐난했다. ‘안 그래도 흔들흔들 어지러운 기차에서 뭐하러 거꾸로 앉아요?.’ 나는 미안함에 이죽대며 너스레 떨어본다. ‘살살 어지러운게 왠지 사람 마음 간질이는 것 같아서 좋지 않아?’ 솔직히 내 생각에도 설득력 없는 말이다.아내는 금새 곁에서 잠든다. 나는 차창에 얼굴을 가까이 대고 기차의 먼 꼬리 방면을 살폈다. 원근감이 매끄럽다. 마음이 묘하다. 지나온 공간, 꼬리편의 풍경을 눈에 담고 있다보면 아내
저는 졸업을 앞두고 있는 20대 대학생 남성입니다.대한민국에서 대학생이 우파인 경우는 찾기 힘듭니다. 대학에서는 워낙 좌편향적 풍토가 지배적이기 때문에 교수들도 친구들도 모두 좌파입니다. 물론 저도 남들과 뇌 구조가 특별히 다르지 않은 평범한 대학생이라 영락없이 좌파로 청춘을 보낼 뻔했습니다. 그런 제가 어떻게 우파로 돌아서게 되었는지에 대해 자기 분석한 이야기를 공유하려고 합니다.저의 20대 초반은 대학에서의 좌파 이념에 대한 흠모의 시기였습니다. 그 당시 저희 대학에서는 포스트모더니즘 사조의 인문학 강좌들이 필수 교양 과목이었고
저는 1979년에 경기도 성남에서 태어나 27년간을 살다가 지금은 경기도 광주에 살고 있습니다.98년도에 아주대에 입학했어요. '대리 출석'이 만연했고, 매일 갖은 핑계의 술판만이 기억납니다. 공강 시간에 도서관 가다가 만난 선배에게 '요새 1학년은 왜이리 공부를 열심히 하냐'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그냥 씁쓸했던 기억이 나네요. 대학교에서 처음 치른 '공학 수학'시험이 아직도 기억에 남습니다. 옆에 앉은 내가 느낄 정도로 주위 사람들은 컨닝을 했지만 언젠가 술자리를 같이 했었던 조교 형은
안녕하세요 전라북도 전주에 사는 20대 청년입니다.저는 어릴 때부터 조금 유별나게 역사, 사회, 정치적 거대담론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국사과목만은 항상 만점을 맞았고 뉴스, 신문은 매일 꼬박꼬박 보며 저의 생각을 정리하고 가치관을 정립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전라도 특성상 좌파 이념이 자연스럽게 유입되었고 지금 생각해보면 사회(지역) 분위기는 물론 학교에서 조차 우파는 기득권, 요즘말로 적폐세력이라 가르치며 논술 공부한다는 미명 하에 좌파언론의 사설만을 제시하고 근현대사 시간에 ‘백년전쟁’이라는 다큐도 서슴없이 틀어주었던
1828년 관세법은 즉시 “증오의 관세”라는 악명을 얻었다. 이제 그 관세법의 경쟁자가 나타났다.트럼프 관세 프로그램은 그 날로 돌아가게 하는 듯하다. 도대체 트럼프의 목적은 무엇인가? 먼저 다른 질문부터 시작하자. 트럼프가 그것이 선거기부금 또는 11월 선거에 나쁜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했음에도 이 길을 걷는 것일까? 바보 같은 질문이다. 내가 보기로는 트럼프의 관세정책은 1930년의 스므트-홀리(Smoot-Hawley) 관세이후 가장 뻔뻔스럽게 선거와 정치자금에 맞닿아 있으며 그것은 큰 실수로 역사에서 추락할 것이다.스므트-홀리는
한국인들은 냉전시대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는 ‘좋은 경찰(Good Cop)’ 역할을 수행했던 미국에 지나치게 익숙해져 있는지 모른다. 지금 세계는 신냉전 시대를 맞이하여 다시 양분과 대결 양상을 보이고 있지만, 미국은 오히려 고립주의와 이기주의를 선택하고 있다. 그래서 미국의 ‘좋은 경찰’역할에 의지하면서 국가생존을 도모해왔던 중소국들은 기로로 내몰리고 있다. 북핵 해결이 여전히 불투명한 가운데 동맹위기를 맞고 있는 한국이 특히 그렇다.팍스 아메리카나와 ‘미국 우선주의’의 모순1991년 12월 소련이 해체되면서 냉전은 종식되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