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지난 2일부터 한미연합군사훈련에 대한 반발 명분으로 화력 및 미사일 도발을 연일 감행하고 있는 가운데, 한미동맹의 발전된 미래상의 실제 구현체제인 '한미연합사령부(CFC)'에 눈길이 쏠리고 있다.바로 다가오는 11월7일은, 한미연합사 창설 44주년을 맞이하기 때문이다. 는 약 70년을 넘기고 있는 한미동맹 관계사에 한 획을 그었던 '한미연합사령부'의 지난 이력을 밝힘으로써, 북핵 위협을 비롯해 향후 있을 통일한국의 핵심의제 '전시작전통제권(전작권)'의 의미를 재조명하고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69년 전이던 1953년 7월27일은 북한에 의한 6·25전쟁 발발 시점으로부터 3년을 넘기고서야 정전협정이 맺어진 날이다. 이를 기점으로 한반도에서는 정전체제가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한반도 정전체제는 유엔군사령부(유엔사령부, UNC)에 의해 그나마도 간신히 유지되고 있는 실정이다. 하지만 정전협정 체제를 지탱하는 실질적인 두 개의 축은 사실상 반쪽짜리 기능을 하고 있는 상황이다.정전협정 체제를 지키는 두 개의 축은, 크게 정전협정 제19항에 명시된 군사정전위원회(군정위)와 제36항의 중립국감시위원회(중립국감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정상회의를 위해 유럽 순방 중인 윤석열 대통령이 30일(현지시각) 오후3시 나토의 옌스 스톨텐베르그 사무총장 면담을 진행한다고 대통령실이 밝혔다.당초 나토 사무총장 면담은 지난 28일 예정돼 있었으나, 스웨덴을 비롯한 핀란드·터키와 나토 사무총장 간 4자 회담이 연장됨에 따른 것이다.이번 순연 사태에서의 핵심 국가는 바로 '스웨덴'이다. 나토 사무총장 면담 순연 배경에는 터키가 스웨덴·핀란드의 나토 가입을 반대하면서 비롯된 것으로, 터키 내 테러 유발 지정단체를 스웨덴이 숨겨주고 있다는
문재인 대통령의 최근 정치적 행보의 메시지가 '종전선언과 평화협정'으로 집중된 가운데, 북한의 대남공작 기구 소속 고위급 탈북자의 증언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바로 정찰총국 소속 대좌로 지난 2014년 탈북해 우리나라로 들어온 김국성 씨가 지난 16일 국내 방송 최초로 펜앤드마이크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현 정세에 대한 진단을 밝힌 것.김국성 씨는 이날 오후 서울 종로구 인사동의 펜앤드마이크 본사를 방문해 천영식 대표이사와의 인터뷰에 모습을 드러냈다.그에게 이날 집중된 질문 중 단연코 관건은 '종전
야권의 유력 대권 주자 최재형 前 감사원장의 27일 발언이 화제다. 이번 27일은 정전협정 68주년을 맞는 날인데다, 문재인 대통령이 이를 외면한 상황에서 야권 유력 인사가 그 의미를 재부각시켰기 때문이다. 어떤 발언이 있었길래 이같은 비교가 나오는 것일까.최 전 원장은 이날 경기 연천의 UN군 화장터를 방문해 "6·25전쟁은 북한을 앞세운 종북, 소련 등 국제 공산주의 세력의 확산을 위한 남침으로 시작됐다"라며 "실질적으로 우리 대한민국이 막아냈고, 실질적으로 우리의 생명과 자유를 지켜낸 승리한 전쟁"이라고 강조했다.이어 "자유대
지금으로부터 68년 전인 1953년 7월27일은, 북한의 기습 남침으로 시작된 6·25전쟁이 휴전협정을 맺음으로써 한반도의 정전체제가 시작된 날이다.그런데, 이번 27일부로 '정전체제'가 시작된지 68년이 되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반쪽짜리 정전협정'에 불과한 모양새다.실제로, 1984년부터 유엔군사령부에서 근무했던 김영규 공보관은 최근 기자와의 통화에서 "그동안 북한군과 수백여 차례에 걸쳐 회담을 했지만, 제대로 합의를 마무리한 적은 없었다"라고 밝힌 바 있다.게다가 한반도 정전협정의 핵심축인 &
북한의 기습 남침으로 시작된 6·25 전쟁이 25일 71주년을 맞이했지만, 돌아오지 못한 국군용사들의 존재가 잊혀지는 모양새다. 바로 '국군포로'에 대한 이야기다.71년 전 20대의 꽃다운 나이로 북한에 맞서 나라를 지킨 그들이지만, 북한에 억류됨에 따라 무려 7만여 명의 국군용사들이 지금까지 우리 곁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1994년 조창호(故) 소위를 시작으로 북한에서 자력 탈출한 극소수의 국군용사들이 우리나라도 돌아왔지만, 지난 5일부로 이들 중 생존한 인사는 18명에 불과하다.기자는 이날 북한에서 47년만에
1. 남방정치(南方政治) 모택동은 1965년 11월 12일 북경을 떠나 호북성의 무한과 절강성 항주를 오가며 생활했다. 1966년 7월 18일에야 그는 다시 북경의 땅을 밟게 된다. 문화혁명의 불길이 막 치솟기 시작하던 최초의 8개월 간 그는 북경을 떠나 있었다. 1950년대부터 이미 모택동은 중앙정치가 난마처럼 꼬이면, 훌쩍 떠나 남방으로 가곤 했다. 1953년 12월 모택동은 헌법을 수정한다는 명분으로 항주로 내려가 서호의 빌라에 머물렀는데, 당시 중앙정치는 부주석 고강(高崗, 1905-1954 Gao Gang)과 중공중앙조직부
1. 주석님의 호화열차 1965년 12월 초, 계획대로 요문원의 오함 비판이 전국의 주요 매체를 장식하자 모택동은 유유히 북경을 떠나 상해로 향했다. 이후 8개월 그는 북경에 돌아가지 않은 채로 상해와 장강 이남의 도시들을 오가며 지냈다. 모택동은 원할 때면 언제든 어느 곳이든 불쑥 찾아가서 맘대로 머물 수 있는 특권을 누렸다. 무한, 항주, 광주 등등 전국의 주요 도시에는 모택동만 사용하는 호화 빌라들이 있었다. 항주에 가면 그는 서호(西湖) 부근에 위치한 청나라 거상의 빌라에 머물렀다. 16만 평에 달하는 호화판 저택이었다. 무
1. 왜 다시 문혁인가? 여전히 중국현대사를 찬양하면서 한국현대사를 폄훼하는 사람들이 많은 듯하다. 욱일승천하는 중국의 위상을 살피고 대응할 겨를도 없는데 왜 하필 지금와서 문혁을 들춰내냐 묻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을 위해 중공정부에서 공식적으로 발표한 문혁 피해 관련 통계를 하나만 돌아 보자. 1978년 11월 10일부터 12월 15일까지 북경에서는 중국공산당 제11기 중앙위원회 공작회의가 개최됐다. 모택동 사망 2년 2개월 후, 사인방 체포 2년 1개월 후의 일이었다. 형식상 당시의 국가주석 화국봉(華國鋒, 1921-20
1. 팽진(彭眞, 1902-1997, Peng Zhen)의 저항1965년 11월 초 를 비롯한 북경의 주요언론들은 모두 요문원의 글을 거부했다. 그런 이유 때문에 요문원의 글은 부득이 1965년 11월 10일 상해의 에 실릴 수밖에 없었다. 그 후 거의 3주가 지난 11월 29일 와 에, 11월 30일 에 요문원의 같은 글이 게재됐다. 그 20여일의 시간 동안 무슨 일이 있었을까? 강력한 권력자가 북경의 언론사에 외압을 넣었으며, 북경의 언론사들은 저항하고 있었음
1. “대반란의 기획” 1965년 11월 30일 에 실린 요문원의 비평 은 문화혁명의 신호탄이었다. 이 한 편 문제의 글로 요문원은 일약 문예계의 기린아로 급부상한다. 그는 이후 모택동의 부인 강청(江靑, 1914-1991, Jiang Qing), 상해의 좌파작가 장춘교(張春橋, 1917-2005, Zhang Chunqaio)와 함께 이른바 "문혁 4인방"의 한 명이 된다. 요문원의 비평문은 개인의 작품이 아니라 치밀하게 기획되고 준비된 "대반란" 수뇌부의 비밀무기였다. 물론 대반란
1. "수정주의에 반대하라!” 1965년 11월 30일 화요일 북경시내. 최저기온 영하 8도의 싸늘한 기온. 북에서 불던 바람이 슬그머니 남으로 방향을 바꾼 그날. 매캐한 석탄재가 날렸음에도 푸르스름한 하늘빛이 수줍게 드러나는 맑은 날씨였다. 이른 새벽부터 북경시내는 북적였다. 자전거를 타고 가는 청년들, 더운물을 실은 수레를 끌고 가는 노인들, 재잘거리며 등교하는 학생들, 일터로 가기 위해 버스에 오르는 노동자들. 모두가 분주히 바쁜 일상을 서두르고 있었지만,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큰 사건이나 사고는 딱히 없어 보였다. 그날
1. 문화혁명: 대중운동인가? 관제데모인가? 공식적으로 “중국 무산계급 문화대혁명”은 1966년 5월 16일 중공중앙위의 통지가 정부 각 조직에 반포되면서 시작되어 1976년 10월 4일 4인방이 전격적으로 체포될 때까지 무려 10년 동안 전 중국을 혼란, 폭력, 살육, 기근 속으로 몰아넣었던 극단적인 “대중운동”(mass movement)이었다. “대중운동”에 국가공인의 발발과 종결의 시점이 있다는 사실은 지독한 패러독스(paradox)이다. 모름지기 대중운동이란 권력의 부패나 국가의 폭력에 맞서는 인민의 자발적인 저항이어야 한다
[文革春秋: 現代中國의 슬픈 歷史] 34回. “黑苗와 白描의 辨證法” 1. 혁명이냐, 생존이냐? 대약진운동의 처참한 실패 이후 중공지도부는 두 패로 갈렸다. 모택동이 주자파(走資派, 자본주의의 길을 가는 세력)라 비판했던 개혁세력은 대기근의 참사를 수습하고 파탄지경에 이른 경제를 회복하려는 실용주의자들이었다. 반면 모택동이 이끄는 강경세력은 자력갱생의 구호 아래 핵무장을 추진하는 한편 계급혁명의 깃발을 내걸고 이념투쟁을 이어가고 있었다. 1961-1965년 사이 유소기와 등소평에 의한 경제개혁이 한참 진행될 때, 실제로 이 두 세력
[文革春秋: 現代中國의 슬픈 歷史] 28回. “責任지라, 빅브라더” 1. 꿈꾸는 빅브라더 빅브라더는 60대 중후반의 나이에도 여전히 역사의 비약을 확신했다. 15년 안에 영국과 미국을 추월하자 부르짖었다. 사회주의를 넘어 지상(地上)의 공산유토피아를 만들자 호소했다. 부강하고 정의로운, 풍요롭고 평등한 새로운 중국을 건설하자며 지친 인민들을 다독였다. “수정주의자” 흐루쇼프의 소련을 대신해서 이제 중국이 사회주의 종주국으로 우뚝 솟아야 한다고 그는 믿었다. “더 많이, 더 빨리, 더 좋게, 더 아끼자”며 그는 온 사회를 흔들고 쑤시
[文革春秋: 現代中國의 슬픈 歷史] 31回. “체어맨의 外交術”1. 외교는 싸움이다.2017년 12월 13-17일 방중(訪中)한 문재인 대통령은 모두 열 끼니 중에서 여덟 끼니를 중국 측 고관들과 마주 앉지 못한 채 이른바 “혼밥”을 먹어야만 했다. 한국 매체에선 거센 홀대논란이 일었다. 문대통령은 이른 아침 서민 식당을 깜짝 방문해 밀가루 튀김 유조(油條, youtiao)를 먹는 외교쇼를 연출했건만 홀대논란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기대했던 중공 서열 2위 이극강(李克强, Li Keqiang, 1955- )과의 오찬 식사도 무산됐기
[文革春秋: 現代中國의 슬픈 歷史] 30회. “차르(Czar)의 유토피아” 1. 대약진의 신기루 대약진운동의 깃발이 중국 전역에 나부낄 때, 인민의 유토피아는 어디에도 없었다. 유토피아란 차르(Czar)의 의식을 점령한 신기루일 뿐이었다. 모두가 차르의 신기루를 바라보며 유토피아의 꿈을 강요받던 시절이었다. 중공중앙의 고위급 관료부터 산간벽지의 농민들까지 모두가 한 입으로 거짓말을 해야 했다. 모두가 스스로 내뱉은 거짓부렁에 속아야만 했다. 불가능을 꿈꾸며 굶어죽던 시간이었다. 기만과 허위의 계절이었다. 농촌의 현실에 입각해 생산
인류사최대의 기근 (3): "언론이 인민을 굶겨죽이다!"[文革春秋: 現代中國의 슬픈 歷史] 29. “人類史 最大의 饑饉”(3) "言論이 人民을 굶겨죽이다!" 1. 노병의 직언, 정치적 자살 1959년 7월 2일부터 강서성 여산에서 개최된 중공중앙의 정치국 확대회의에서 팽덕회는 서북소조(西北小租)에 배속되었다. 대약진 당시 중국 서북지역의 상황을 점검하는 토론분과였다. 토론 과정에서 팽덕회는 당시 중국전역에서 발생하는“좌의 오류”를 지적하기 시작했다. 우선 그는 대약진운동 과정에서 정부조직에 만연해 있던 모럴해저드를 뼈아프
인류사최대의 기근 (2): "정치가 인민을 굶겨죽이다!"[文革春秋: 現代中國의 슬픈 歷史] 28回. “人類史 最大의 饑饉”(2) 대약진은 대기근으로 귀결되었다. 1958년-1962년 중국 전역에서 3천6백만에서 4천5백만 명이 아사(餓死)했다.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굶어죽어야만 했을까? 인류사 최악의 대기근의 와중에 대체 중공정부는 무엇을 하고 있었나? 살아남은 사람들은 무엇을 했던가? 1998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아마르티아 센(Amartia Sen, 1933)은 “언론의 자유가 있는 민주국가에서 대규모 기근이 발생한 사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