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진핑: "동의하는 대표는 손을 들어주세요(同意的代表请举手)."(전원 거수) "동의하지 않는 대표는 손을 들어주세요(不同意的请举手)."(없음)"없습니다(没有)" "없습니다(没有)"시진핑: "없습니다. 통과(没有.通过)."지난 16일부터 22일까지 이어졌던 제20차 중국공산당 전국대표대회(당대회)의 '핵심' 장면은 폐막식의 거수 투표였다. 명목상으로는 시진핑 주석을 포함한 205명이 차기 당 중앙위원회 위원의 선출 찬반여부를 묻는 투표였지만 사실상 시진핑 주석의 3연임을 확정짓는 과정이었기 때문. 베이징 인민대회당에 배
1. 왜 다시 문혁인가? 여전히 중국현대사를 찬양하면서 한국현대사를 폄훼하는 사람들이 많은 듯하다. 욱일승천하는 중국의 위상을 살피고 대응할 겨를도 없는데 왜 하필 지금와서 문혁을 들춰내냐 묻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을 위해 중공정부에서 공식적으로 발표한 문혁 피해 관련 통계를 하나만 돌아 보자. 1978년 11월 10일부터 12월 15일까지 북경에서는 중국공산당 제11기 중앙위원회 공작회의가 개최됐다. 모택동 사망 2년 2개월 후, 사인방 체포 2년 1개월 후의 일이었다. 형식상 당시의 국가주석 화국봉(華國鋒, 1921-20
1. “문화혁명 5인 소조”: 모주석의 사전포석 요문원의 “해서파관” 비판은 적의 화약고를 향해 발사된 불화살이었다. 불화살이 사령부의 나무기둥에 꽂혀 불길이 스멀스멀 타올랐지만, 적진의 장수들은 전쟁이 임박했음을 눈치 채지 못했다. 불화살의 발사명령을 내린 장수는 다름 아닌 모택동이었고, 요문원은 그저 밀파한 자객인 셈이었다. 자객의 칼놀림이 위협적이었기에 오함을 보호하기 위해 일군의 지식분자들이 싸움에 나섰다. 피 튀기는 사상투쟁이 시작되었다. 생사를 가르는 “말의 전쟁”(war of words)이었다. 주은래의 압박을 못 이겨
[文革春秋: 現代中國의 슬픈 歷史] 20回. “中央書記處의 秘密” 1. “먼저 쓰라고 해놓고선······.” 중국의 백화제방운동(1957)과 반우파(反右派)운동(1957-1958)을 생각하면 뇌리에 겹쳐지는 학창 시절의 에피소드 하나가 있다. 1985년 서울 서북지역 한 중학교 교실에서 일어났던 일. 30대 중반의 한 미술교사가 학생들을 향해 말했다. “지금부터 빈 종이에 이 선생님에 대한 불만과 건의사항을 자유롭게 써라!” 뜻밖의 요구에 어리둥절해진 학생들을 향해 교사가 거듭 말했다. “뭐라고 써도 좋으니 깨알같이 너희들의 생각을
[文革春秋: 現代中國의 슬픈 歷史] 19회. “빅브라더의 精神世界” 20세기 세계사에서 인간평등을 모토로 삼은 대부분의 공산주의 정권들은 일인독재와 인격숭배의 디스토피아(dystopia)로 귀결되고 말았다. 대체 어떤 이유 때문에 수백, 수천만, 혹은 10억 이상의 인간집단이 단 한 명의 영도자를 그토록 흠모하고, 추종하고, 숭배하게 되는 걸까? 영웅적 카리스마 때문일까? 매스미디아의 선전선동 때문일까? 계급투쟁, 인민해방, 민족주의 등등의 이념들 때문일까? 세뇌교육 때문일까? 감시와 처벌 때문일까? 억압과 통제 때문일까? 대체 그
[文革春秋: 現代中國의 슬픈 歷史] 18회. “百花齊放, 右派사냥” 1. 못 다 핀 꽃송이들 1957년 4월 말부터 6월초까지 중국 전역에서 들불처럼 이른바 “백화제방(百花齊放)운동”이 일어났다. 백화제방이란, 수많은 종류의 꽃들이 모두 활짝 피어난 상태를 의미한다. 수많은 사상가들이 경쟁하던 춘추전국시대(기원전 8세기-3세기)의 “백가쟁명(百家爭鳴)”과 짝을 이루는 성어(成語)이다. 1956년 소련의 흐루쇼프(1894-1971)가 탈(脫)스탈린 운동을 전개한다. 이어서 폴란드와 헝가리에 대규모 시위가 발생하고, 소련군은 탱크를 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