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남 이승만 박사의 최초의 기도' 나의 영혼을 구원해준 것처럼 이 민족을 구원해 주시옵소서!남북으로 갈라진 국토에 이념의 전쟁이 지금도 진행 중이다. 그러나 어느 한사람의 진념과 신념으로써 우남 이승만 전 대통령의 진실을 알게 되었다. 역사를 잊은 국민에게는 미래가 없다라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된 것이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한사람으로써 깊은 죄책감이 든다. 항간에 상영되었던 다큐멘터리 영화가 우리 곁을 진짜와 가짜로 다가왔다.'길 위에 김대중‘은 개봉 28일 만인 12만 여명 관객을 넘었으며 지난해 상영된 '문재인 입니다’는 5월
국민의힘 소속 지자체장으로 당내 어른격 정치인이기도 한 두 사람이 최근 잇따라 김기현 당대표 사퇴 촉구와 차기 비상대책위원장 인선 문제 등에 있어서 같은 메시지를 내놓고 있다. 홍준표 대구시장과 김태흠 충남지사 두 사람은 김한길 국민통합위원장이 현재 당의 비대위원장을 맡기에 최적격이라고 판단하는 걸로 보인다. 홍 시장은 17일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정치 경험 많고 큰판을 다루어본 사람을 영입해서 비대위를 만들어야지 윤 대통령 아바타를 다시 당대표를 만들어 본들 그 선거가 되겠나?"라며 "쇄신 대상자들이 자기가 살아 남을려고 꼭
국민의힘 의원들이 비상의원총회에서 한동훈 법무부 장관을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추대하는 문제를 놓고 서로 강하게 충돌했다. 비대위원장 인선과 관련해 당 안팎에서 논란이 이어지자 홍준표 대구시장은 "사욕들 버리고 정신들 차려라"라고 비판했다.15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비공개 의총에서 처음으로 마이크를 잡은 김성원 의원은 "이 위기를 뚫고 나갈 수 있는 분이 여권에 있는 한동훈 장관"이라며 "삼고초려해서 모셔와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에 지성호 의원과 김석기 의원 등도 "총선을 위해 우리 당을 승리로 이끌 수 있는 유력한 인물"이라
‘중진국 함정’은 성장동력이 꺼져 고도성장을 이어갈 수 없는 경제상황의 도래를 의미한다. 2015년까지만 해도 중국의 관변 학자와 관영 언론은 ‘중국의 중진국 함정’ 가능성을 일축했다. 중국의 부상에 대한 질투나 서방의 반중(反中) 정서로 치부했다. 중국은 중진국 함정에 빠지지 않을 것이라는 ‘중국 예외론’을 신봉했다. 그러다가 중국 러우지웨이(樓繼偉) 재정부 부장이 2015년 4월 한 포럼에서 “향후 5~10년 이내에 중국이 중진국의 함정에 빠질 확률은 50% 이상”이라고 시인하면서, 중국 지도부가 중국 경제의 현실적 위협을 인식
문화인류학에서 '타문화는 거울'이란 말이 있다.타문화란 비교문화를 통해 타자를 인식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그 '거울'에 비춰진 자신을 새롭게 인식하게 해 준다.필자는 처음으로 '동아시아 유교의 농도(濃度)'란 개념을 발안했다. 술은 알콜의 농도에 따라 그 내용물을 알 수 있듯이 한중일 유교의 농도를 비교분석해 보면 그 내용의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난다.우리는 지금껏 상식적 내지 통설적으로 '동아시아 유교 문화권'이란 것을 믿어 왔지만, 그에 대해 무조건 '통설'로
북한은 김정은 체제 유지를 위해 ‘반동사상문화배격법’을 제정하는 등 서방세계 문화, 특히 남한문화 유입 차단에 안간힘을 쓰고 있다.하지만 정작 북한에서 남한 문화를 가장 즐기는 사람은 김정은 위원장과 아버지 김정일 등 이른바 백두혈통과 극소수 지배층이라는 점에서 이같은 조치의 허구성을 드러내는 한편 지속가능성에도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1984년 발표된 가수 최진희의 노래 ‘사랑의 미로’는 대한민국 뿐 아니라 북한에서도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1990년대에 중국 연변을 통해 이 노래가 북한에 유입되자 김정일은 물론 대중들에게 급속히
2015년 중국 정부는 야심차게 반도체 굴기를 선언했다. 10년간 1조위안 160조원을 투자해서 15%인 반도체자급률을 2025년까지 75%로 올리겠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5년이 지난 2020년 현재 반도체 자급률은 여전히 15% 수준에 머물러 있다. 반도체 기업들의 실질적 파산도 줄을 잇고 있다. 푸젠진화 반도체, 우한 홍신반도체, 난징 타코마반도체, 쳉두 글로벌파운드리 등의 실질적 파산, 칭화유니그룹의 회사채 디폴트 등이 중국 반도체 산업의 현상황을 잘 보여준다.실패들이 갑작스러워 보이지만 과거가 되풀이되는 성격이 강하다. 중국
왕이 후계자를 미처 지명하지 못한 채 사망하거나 유고 상황이 발생할 경우, 차기 권력자가 등장할 때 까지의 공백기를 말한다. 하지만, 현대 정치에서도 종종 등장하는 것이 공위시대이며, 벨기에에서는 500일이 넘게 정부의 수반이 없는 경우도 있었다.(벨기에는 총선에서 과반을 달성한 정당이 없는경우 종종 공위시기를 맞지만, 그래도 잘 짜여진 행정시스템 덕에 아무문제 없이 국가를 유지할 수 있다)한편 좌파들의 투쟁전략인 진지전을 제시해 유명한 안토니오 그람시는 공위시대에 대해 다른 해석을 내놨는데, 바로 "낡은 것들이 죽어가는데 새로운
1. 남방정치(南方政治) 모택동은 1965년 11월 12일 북경을 떠나 호북성의 무한과 절강성 항주를 오가며 생활했다. 1966년 7월 18일에야 그는 다시 북경의 땅을 밟게 된다. 문화혁명의 불길이 막 치솟기 시작하던 최초의 8개월 간 그는 북경을 떠나 있었다. 1950년대부터 이미 모택동은 중앙정치가 난마처럼 꼬이면, 훌쩍 떠나 남방으로 가곤 했다. 1953년 12월 모택동은 헌법을 수정한다는 명분으로 항주로 내려가 서호의 빌라에 머물렀는데, 당시 중앙정치는 부주석 고강(高崗, 1905-1954 Gao Gang)과 중공중앙조직부
세계 경제가 추락을 시작했다. 3월 9일을 기준으로 한국 증시는 -4.19%, 중국은 -3.01%, 미국 -6.4%, 이탈리아 -9.99% 추락했다. 국제 유가가 10% 이상 하락한 것이 증시 폭락의 큰 원인이 됐다. 러시아와 사우디가 감산 합의에 실패했기 때문이라지만, 근본 원인은 석유에 대한 수요 감소 때문이다. 우한 바이러스로 사람들이 집을 나서기 꺼리다 보니 모든 경제활동이 멈추기 시작했고 기름에 대한 수요도, 기름값도 바닥을 향하게 되었다.중국의 붕괴, 중국 의존 경제의 붕괴이것은 지난 40년간 세계 경제를 지배해온 패러다
1. 주석님의 호화열차 1965년 12월 초, 계획대로 요문원의 오함 비판이 전국의 주요 매체를 장식하자 모택동은 유유히 북경을 떠나 상해로 향했다. 이후 8개월 그는 북경에 돌아가지 않은 채로 상해와 장강 이남의 도시들을 오가며 지냈다. 모택동은 원할 때면 언제든 어느 곳이든 불쑥 찾아가서 맘대로 머물 수 있는 특권을 누렸다. 무한, 항주, 광주 등등 전국의 주요 도시에는 모택동만 사용하는 호화 빌라들이 있었다. 항주에 가면 그는 서호(西湖) 부근에 위치한 청나라 거상의 빌라에 머물렀다. 16만 평에 달하는 호화판 저택이었다. 무
1. 왜 다시 문혁인가? 여전히 중국현대사를 찬양하면서 한국현대사를 폄훼하는 사람들이 많은 듯하다. 욱일승천하는 중국의 위상을 살피고 대응할 겨를도 없는데 왜 하필 지금와서 문혁을 들춰내냐 묻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을 위해 중공정부에서 공식적으로 발표한 문혁 피해 관련 통계를 하나만 돌아 보자. 1978년 11월 10일부터 12월 15일까지 북경에서는 중국공산당 제11기 중앙위원회 공작회의가 개최됐다. 모택동 사망 2년 2개월 후, 사인방 체포 2년 1개월 후의 일이었다. 형식상 당시의 국가주석 화국봉(華國鋒, 1921-20
1. 팽진(彭眞, 1902-1997, Peng Zhen)의 저항1965년 11월 초 를 비롯한 북경의 주요언론들은 모두 요문원의 글을 거부했다. 그런 이유 때문에 요문원의 글은 부득이 1965년 11월 10일 상해의 에 실릴 수밖에 없었다. 그 후 거의 3주가 지난 11월 29일 와 에, 11월 30일 에 요문원의 같은 글이 게재됐다. 그 20여일의 시간 동안 무슨 일이 있었을까? 강력한 권력자가 북경의 언론사에 외압을 넣었으며, 북경의 언론사들은 저항하고 있었음
1. “대반란의 기획” 1965년 11월 30일 에 실린 요문원의 비평 은 문화혁명의 신호탄이었다. 이 한 편 문제의 글로 요문원은 일약 문예계의 기린아로 급부상한다. 그는 이후 모택동의 부인 강청(江靑, 1914-1991, Jiang Qing), 상해의 좌파작가 장춘교(張春橋, 1917-2005, Zhang Chunqaio)와 함께 이른바 "문혁 4인방"의 한 명이 된다. 요문원의 비평문은 개인의 작품이 아니라 치밀하게 기획되고 준비된 "대반란" 수뇌부의 비밀무기였다. 물론 대반란
1. "수정주의에 반대하라!” 1965년 11월 30일 화요일 북경시내. 최저기온 영하 8도의 싸늘한 기온. 북에서 불던 바람이 슬그머니 남으로 방향을 바꾼 그날. 매캐한 석탄재가 날렸음에도 푸르스름한 하늘빛이 수줍게 드러나는 맑은 날씨였다. 이른 새벽부터 북경시내는 북적였다. 자전거를 타고 가는 청년들, 더운물을 실은 수레를 끌고 가는 노인들, 재잘거리며 등교하는 학생들, 일터로 가기 위해 버스에 오르는 노동자들. 모두가 분주히 바쁜 일상을 서두르고 있었지만,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큰 사건이나 사고는 딱히 없어 보였다. 그날
1. 문화혁명: 대중운동인가? 관제데모인가? 공식적으로 “중국 무산계급 문화대혁명”은 1966년 5월 16일 중공중앙위의 통지가 정부 각 조직에 반포되면서 시작되어 1976년 10월 4일 4인방이 전격적으로 체포될 때까지 무려 10년 동안 전 중국을 혼란, 폭력, 살육, 기근 속으로 몰아넣었던 극단적인 “대중운동”(mass movement)이었다. “대중운동”에 국가공인의 발발과 종결의 시점이 있다는 사실은 지독한 패러독스(paradox)이다. 모름지기 대중운동이란 권력의 부패나 국가의 폭력에 맞서는 인민의 자발적인 저항이어야 한다
20여 년 전, 중국 지도자 등소평의 유언이 세간에 크게 화제가 된 적이 있다. 파란만장한 권력 암투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아 마침내 중국 최고 권력자가 된 사람, 말 한마디로 천하를 호령한 절대 권력자. 그런 사람이 백년 가까이 천수를 누린 끝에 검소한 장례를 부탁하면서 화장한 뼈를 바다에 뿌려달라는 유언을 남기자 대중들은 크게 감동했다.사람은 누구나 죽으면 한 줌 재로 돌아간다. 이 만고불변의 진리를 우리는 평소 잊고 살아간다. 심지어 죽어서까지 억만금을 들여 호사스러운 명당을 짓고, 온갖 진귀한 석물로 무덤을 치장하려는 수많은
1. 1960-70년대 한국언론의 문화혁명 관련기사지난 회에 언급한대로 김동춘은 1970년대에는 "중국 사람들도 밥 먹고 산다는 얘기"만 해도 죄악이 되었다고 주장했다. 과연 그랬을까? 박정희 정권 하에선 중국에 관한 지극히 기초적인 사실을 말만 해도 처벌되었을까? 박정희 정권 당시 과연 대한민국의 일반국민은 중국에 관한 어떤 정보에 노출되어 있었을까? 1976년 7월 10일 아침 동아일보는 1면에 “毛澤東死亡(모택동사망)”을 대서특필했다. 그 기사를 그대로 옮기면 아래와 같다. "모택동 사망. 84세. 어제 새벽 1시- 18일에
1. 1970년대 리영희의 “비판적 중국학”이란? 리영희는 대한민국 좌파세력의 구루(Guru)다. 현재 50-60대 한국 인텔리들은 젊은 시절 리영희의 저작을 읽으며 사회주의적 이상주의를 키웠다. 여러 논객들은 그를 “살아있는 신화”로, “한국현대사의 길잡이”로, “한국현대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언론인 중 한 명”으로, “사상의 은사”로, “허구의 시대에 정직하게 살려고 했던 인간의 징표”로 미화해 왔다. 문재인 대통령 역시 여러 차례 리영희의 저서를 통해 현실에 눈뜨고 가치관을 정립했음을 고백한 적이 있다. 예컨대 2010년 1
9월 28일 서울 서초구 서초동 일대에서 열린 '서리풀 축제'와 동시에 치러진 촛불집회 참가자 인원을 두고 1백만이니 2백만이니 하는 군중숫자 부풀리기가 또 기승을 부리고 있지만 이제는 탄핵정국 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다. 문제의 집회를 두고 일각에서는 조국 법무부 장관 일가를 법대로 수사하겠다는 윤석열 검찰총장의 방침에 항의하는 '조국수호 촛불문화제'라고 한다.한국사회가 아직 전근대성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증거다. 예기(禮記)에 형벌은 위로 대부에까지 미치지 못한다(刑不上大夫)라고 한 봉건사회의 관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