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남방정치(南方政治) 모택동은 1965년 11월 12일 북경을 떠나 호북성의 무한과 절강성 항주를 오가며 생활했다. 1966년 7월 18일에야 그는 다시 북경의 땅을 밟게 된다. 문화혁명의 불길이 막 치솟기 시작하던 최초의 8개월 간 그는 북경을 떠나 있었다. 1950년대부터 이미 모택동은 중앙정치가 난마처럼 꼬이면, 훌쩍 떠나 남방으로 가곤 했다. 1953년 12월 모택동은 헌법을 수정한다는 명분으로 항주로 내려가 서호의 빌라에 머물렀는데, 당시 중앙정치는 부주석 고강(高崗, 1905-1954 Gao Gang)과 중공중앙조직부
1. "헬조선"은 어디로?몇 년 전 코리아에선 “헬조선”이란 말이 크게 유행했었다. 세계 10위권의 IT 강국, 세계 최고의 의료보험제도를 갖춘 대한민국을 날마다 "헬조선"이라 외쳐대며 저주하던 사람들은 문정권이 들어서자 곧바로 그 무시무시한 단어를 내다버렸다. 정권 하나 바뀌니까 지옥이 천당이 되었나? 그들은 어떻게, 왜, 그리도 쉽게 입에 달고 살던 “헬조선”이란 괴상한 신조어를 담배 끊듯 딱 끊어버렸나? 하늘에서 만나라도 내려왔나? 모두 복권이라도 맞았나?“헬조선”은 지난 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해 좌파집단이 급조해낸 심리전의 무
1. 주석님의 호화열차 1965년 12월 초, 계획대로 요문원의 오함 비판이 전국의 주요 매체를 장식하자 모택동은 유유히 북경을 떠나 상해로 향했다. 이후 8개월 그는 북경에 돌아가지 않은 채로 상해와 장강 이남의 도시들을 오가며 지냈다. 모택동은 원할 때면 언제든 어느 곳이든 불쑥 찾아가서 맘대로 머물 수 있는 특권을 누렸다. 무한, 항주, 광주 등등 전국의 주요 도시에는 모택동만 사용하는 호화 빌라들이 있었다. 항주에 가면 그는 서호(西湖) 부근에 위치한 청나라 거상의 빌라에 머물렀다. 16만 평에 달하는 호화판 저택이었다. 무
1. 왜 다시 문혁인가? 여전히 중국현대사를 찬양하면서 한국현대사를 폄훼하는 사람들이 많은 듯하다. 욱일승천하는 중국의 위상을 살피고 대응할 겨를도 없는데 왜 하필 지금와서 문혁을 들춰내냐 묻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을 위해 중공정부에서 공식적으로 발표한 문혁 피해 관련 통계를 하나만 돌아 보자. 1978년 11월 10일부터 12월 15일까지 북경에서는 중국공산당 제11기 중앙위원회 공작회의가 개최됐다. 모택동 사망 2년 2개월 후, 사인방 체포 2년 1개월 후의 일이었다. 형식상 당시의 국가주석 화국봉(華國鋒, 1921-20
1. “문화혁명 5인 소조”: 모주석의 사전포석 요문원의 “해서파관” 비판은 적의 화약고를 향해 발사된 불화살이었다. 불화살이 사령부의 나무기둥에 꽂혀 불길이 스멀스멀 타올랐지만, 적진의 장수들은 전쟁이 임박했음을 눈치 채지 못했다. 불화살의 발사명령을 내린 장수는 다름 아닌 모택동이었고, 요문원은 그저 밀파한 자객인 셈이었다. 자객의 칼놀림이 위협적이었기에 오함을 보호하기 위해 일군의 지식분자들이 싸움에 나섰다. 피 튀기는 사상투쟁이 시작되었다. 생사를 가르는 “말의 전쟁”(war of words)이었다. 주은래의 압박을 못 이겨
1. 팽진(彭眞, 1902-1997, Peng Zhen)의 저항1965년 11월 초 를 비롯한 북경의 주요언론들은 모두 요문원의 글을 거부했다. 그런 이유 때문에 요문원의 글은 부득이 1965년 11월 10일 상해의 에 실릴 수밖에 없었다. 그 후 거의 3주가 지난 11월 29일 와 에, 11월 30일 에 요문원의 같은 글이 게재됐다. 그 20여일의 시간 동안 무슨 일이 있었을까? 강력한 권력자가 북경의 언론사에 외압을 넣었으며, 북경의 언론사들은 저항하고 있었음
1. “대반란의 기획” 1965년 11월 30일 에 실린 요문원의 비평 은 문화혁명의 신호탄이었다. 이 한 편 문제의 글로 요문원은 일약 문예계의 기린아로 급부상한다. 그는 이후 모택동의 부인 강청(江靑, 1914-1991, Jiang Qing), 상해의 좌파작가 장춘교(張春橋, 1917-2005, Zhang Chunqaio)와 함께 이른바 "문혁 4인방"의 한 명이 된다. 요문원의 비평문은 개인의 작품이 아니라 치밀하게 기획되고 준비된 "대반란" 수뇌부의 비밀무기였다. 물론 대반란
1. "수정주의에 반대하라!” 1965년 11월 30일 화요일 북경시내. 최저기온 영하 8도의 싸늘한 기온. 북에서 불던 바람이 슬그머니 남으로 방향을 바꾼 그날. 매캐한 석탄재가 날렸음에도 푸르스름한 하늘빛이 수줍게 드러나는 맑은 날씨였다. 이른 새벽부터 북경시내는 북적였다. 자전거를 타고 가는 청년들, 더운물을 실은 수레를 끌고 가는 노인들, 재잘거리며 등교하는 학생들, 일터로 가기 위해 버스에 오르는 노동자들. 모두가 분주히 바쁜 일상을 서두르고 있었지만,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큰 사건이나 사고는 딱히 없어 보였다. 그날
1. 문화혁명: 대중운동인가? 관제데모인가? 공식적으로 “중국 무산계급 문화대혁명”은 1966년 5월 16일 중공중앙위의 통지가 정부 각 조직에 반포되면서 시작되어 1976년 10월 4일 4인방이 전격적으로 체포될 때까지 무려 10년 동안 전 중국을 혼란, 폭력, 살육, 기근 속으로 몰아넣었던 극단적인 “대중운동”(mass movement)이었다. “대중운동”에 국가공인의 발발과 종결의 시점이 있다는 사실은 지독한 패러독스(paradox)이다. 모름지기 대중운동이란 권력의 부패나 국가의 폭력에 맞서는 인민의 자발적인 저항이어야 한다
1. 1960-70년대 한국언론의 문화혁명 관련기사지난 회에 언급한대로 김동춘은 1970년대에는 "중국 사람들도 밥 먹고 산다는 얘기"만 해도 죄악이 되었다고 주장했다. 과연 그랬을까? 박정희 정권 하에선 중국에 관한 지극히 기초적인 사실을 말만 해도 처벌되었을까? 박정희 정권 당시 과연 대한민국의 일반국민은 중국에 관한 어떤 정보에 노출되어 있었을까? 1976년 7월 10일 아침 동아일보는 1면에 “毛澤東死亡(모택동사망)”을 대서특필했다. 그 기사를 그대로 옮기면 아래와 같다. "모택동 사망. 84세. 어제 새벽 1시- 18일에
며칠 전 (10월 18일) "대진연"이라는 "친북 대학생" 단체가 주한 미대사관저를 월담해 점령했다. 그들은 주한미대사 해리스를 떠나라 외치며 "방위비 분담금 인상 절대 반대" 등의 구호를 외쳤다. "혈세강탈을 막고 재정주권을 지키려 한 의로운 행동"이라며 자신들의 행위를 미화했다는데······. 2019년 10월 세계 10대의 경제대국 대한민국에서 이들은 1980년대 "반미자주" "미군철수" 외치던 주사파 운동권의 사고방식을 앵무새처럼 흉내내고 있다. 월담 과정을 페이스북으로 생중계하는 등 최첨단 소통매체를 활용했지만, 이들이 세
한국 축구 대표팀이 평양에서 열리는 2022 국제축구연맹(FIFA) 카타르 월드컵 아시아 지역 2차예선의 TV 생중계가 무산된 가운데, 0-0으로 무승부로 막을 내렸다. 특히 이날 경기는 무관중 속에 치러져 국제축구연맹(FIFA)을 비롯해 BBC 등 외신의 비판을 받았다.한국 지상파 방송 3사는 "15일 열릴 예정인 남북간 축구경기 중계가 무산됐다"고 발표했다.한국과 북한은 15일 오후 5시30분 평양 김일성경기장에서 2022 FIFA 카타르월드컵 아시아지역 2차예선 조별리그 3차전 경기를 가졌다. 남자 축구대표팀이 북한에서 맞대결
1. 1970년대 리영희의 “비판적 중국학”이란? 리영희는 대한민국 좌파세력의 구루(Guru)다. 현재 50-60대 한국 인텔리들은 젊은 시절 리영희의 저작을 읽으며 사회주의적 이상주의를 키웠다. 여러 논객들은 그를 “살아있는 신화”로, “한국현대사의 길잡이”로, “한국현대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언론인 중 한 명”으로, “사상의 은사”로, “허구의 시대에 정직하게 살려고 했던 인간의 징표”로 미화해 왔다. 문재인 대통령 역시 여러 차례 리영희의 저서를 통해 현실에 눈뜨고 가치관을 정립했음을 고백한 적이 있다. 예컨대 2010년 1
1. “NL주사파” 시대 유감 1990년 가을, 서울 도심 지하철 안에서 벌어진 웃지 못할 에피소드 하나. 도심에서 모종의 정치집회를 마친 운동권들이 떼를 지어 전철을 타고 다음 장소로 이동 중이었다. 퇴근길 붐비는 그 전철 안에서 학생 한 명이 불쑥 소리쳤다.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 보나마나 그는 NL(민족해방노선)계 운동권이었다. 시민들은 힐끔힐끔 기세등등한 그 학생을 곁눈질했다. 눈살을 찌푸리는 승객들도 있었지만, 항의 한 마디 하지 못했다. 짧은 침묵이 살얼음처럼 쫙 퍼지는데, 뒤쪽 끝에 서 있던
제 2부 연재를 시작하며 2018년 1월부터 1년 넘게 펜앤마이크를 통해서 "문혁춘추: 현대중국의 슬픈 역사"를 연재해 왔다. 35회의 연재를 통해 대략 1948년에서 1962년까지 15여 년의 파란만장한 역사를 살펴 보았다. 2부에서는 "문화대혁명"(1966-1976, 이하 문혁)의 역사를 본격적으로 탐구하려 한다. 의 제호를 내걸고도 왜 우리는 그 이전의 역사에 1년 이상 머물러 있었나? 문혁은 중국공산당의 혁명투쟁 과정에서 배태된 필연적 결과이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문혁의 출발점은 1940년대 연
요 며칠 새 586정치꾼들이 일제히 ‘조국’ 살리기에 나서고 있다. 이중 잣대, 자가당착, 내로남불, 심지어는 ‘조로남불’이라는 신조어를 들이대도 이들의 기괴한 정신상태를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586정치꾼들은 지난 40년 간 입만 열면 공정, 정의, 평등을 부르짖던 바로 그 자들 아닌가? 그 자들이 정작 불공정, 불의, 불평등을 몸소 구현한 이중인격의 괴물이 나타났는데, 분노하기는커녕 그 괴물을 감싸고 도는 특이한 정신이상을 보이는 듯하다. 586정치꾼들의 마비된 도덕감각좀도둑엔 도끼를 들고 쳐 죽이자 외치던 사람이 그보다 훨씬
2019년 홍콩에서 부는 바람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불어가는 바람일까? 거세게 일지만 힘없이 사라지는 아닌 밤 돌개바람일까? 산을 허물고 물길을 바꾸는 희귀성 슈퍼태풍일까? 그도 아니라면 해마다 찾아오는 아열대의 계절풍일까? 종잡을 수 없는 바람처럼 홍콩의 미래에 관해선 전망이 엇갈린다. 홍콩의 미래를 점치기 위해선 세계사의 큰 판도를 읽어야 한다. 어쩌면 이번에 홍콩에서 일어난 자유혁명의 마파람은 중국을 바꾸는 허리케인이 될 수도 있다.홍콩의 자유화 운동2019년 6월 15일 주최 측 추산 2백만 명의 홍콩시민들이 이른바 “반송중
[文革春秋: 現代中國의 슬픈 歷史] 35回. "人民民主 人格殺害: 國家主席의 最後" 1. 몰아치는 문혁의 광풍 1966년 5월부터 1976년 9월, 10년간의 세월 동안 중국 전역에는 문화대혁명의 광풍이 몰아쳤다. 문혁을 직접 겪었던 중국의 중·노년층은 지금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당시 중국에선 전국 어디에서나 크고 작은 대중집회가 열렸다. 동료에 대한 직접적 비판과 자아비판을 강요받던 비판회(批判會), 공공기관과 작업장에서 주자파(走資派), 수정주의자 등을 색출해 공개적으로 모욕을 주고 집단린치를 가하는 투쟁회(鬪爭會), 모택동
[文革春秋: 現代中國의 슬픈 歷史] 34回. “黑苗와 白描의 辨證法” 1. 혁명이냐, 생존이냐? 대약진운동의 처참한 실패 이후 중공지도부는 두 패로 갈렸다. 모택동이 주자파(走資派, 자본주의의 길을 가는 세력)라 비판했던 개혁세력은 대기근의 참사를 수습하고 파탄지경에 이른 경제를 회복하려는 실용주의자들이었다. 반면 모택동이 이끄는 강경세력은 자력갱생의 구호 아래 핵무장을 추진하는 한편 계급혁명의 깃발을 내걸고 이념투쟁을 이어가고 있었다. 1961-1965년 사이 유소기와 등소평에 의한 경제개혁이 한참 진행될 때, 실제로 이 두 세력
중국의 전국시대부터 북송(北宋, 960-1127) 직전까지 천 4백 년에 걸쳐 열여섯 조대(朝代)의 정치사를 완성한 사마광(司馬光, 1019-1086)은 그 방대한 기록을 일컬어 통감(通鑑)이라 불렀다. 역사란 인간의 진면목을 반영하는 거대한 '거울'이란 뜻이다. 폭군과 간신의 배덕과 패륜이 빼꼭히 기록된 그 거울 앞에 서면, 과거의 악인들이 훤히 보일 것 같지만, 실은 벌거벗은 우리 스스로의 모습을 마주 대하게 된다.1970년대 말 동네아이들이 흑백텔레비전 앞에 모여 앉아 서부영화를 볼 때면, 중간에 끼어드는 친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