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염'도 어느덧 지나고 선선한 바람까지 부는 최적의 날씨인 추석 연휴, 느긋하게 카페에 앉아 독서를 즐겨보는 것은 어떨까.올해는 10월 2일이 임시공휴일로 지정돼, 휴가를 사용할 경우 한글날까지 최장 12일을 쉴 수 있다.흔치 않은 긴 시간인 만큼 하나의 주제나 분야, 특정한 장르에 관련된 책들을 집중적으로 보며 그 분야를 완전정복하는 것도 괜찮은 독서법이다. 의 김용삼 대기자가 길디긴 이번 추석 황금연휴에 도전해볼만할 책들 5권을 추천했다. 선정 기준은 "우리 근현대사 제대로 알기"다. 주제는 묵직하지만 (마치 한
1990년대 후반 그러니까 21세기를 몇 년 앞둔 시점의 일이었다. ERP(Enterprise Resource Planning) 우리말로는 전사적 자원관리 시스템의 세계적인 공급업체가 인상적인 발표를 했다. 자신들이 그해 회계연도를 마무리하면서 단 하루만에 각종 회계 정산을 끝냈다는 것이었다. 자사 ERP 프로그램의 위력 때문이라는 설명이었다. 당시 IT전문지 기자로 일하고 있던 나는 그 발표를 보면서 한 가지 의문이 생겼다.“이 회사 본사가 자사 ERP 프로그램을 사용해 회계 처리를 깔끔하게 끝낸 건 알겠는데, 이 제품을 사용하는
누가 말했던가, 춘원은 만질수록 덧나는 상처라고. 그러나 사실 만지면 만질수록 춘원은 지성의 샘물이다. 누구보다도 풍부하고 지혜로운 지성으로 사회에 공헌했던 국보(國寶)급 인물이다. 한국 근대사 한복판에서 민족을 지키려고 몸부림쳤던 춘원의 문학, 사상, 식견, 전략 등 최고의 지성상(知性像)은 아무리 높게 평가해도 지나치지 않다.우리는 그의 민족 사랑, 민족을 위한 희생정신, 민족 독립에 대한 열망 등 국사(國士) 춘원 이광수의 마음을 결코 간과하거나 망각해서는 안 된다. 필자는 춘원 연구에서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춘원의 새로운 면모
1. 남방정치(南方政治) 모택동은 1965년 11월 12일 북경을 떠나 호북성의 무한과 절강성 항주를 오가며 생활했다. 1966년 7월 18일에야 그는 다시 북경의 땅을 밟게 된다. 문화혁명의 불길이 막 치솟기 시작하던 최초의 8개월 간 그는 북경을 떠나 있었다. 1950년대부터 이미 모택동은 중앙정치가 난마처럼 꼬이면, 훌쩍 떠나 남방으로 가곤 했다. 1953년 12월 모택동은 헌법을 수정한다는 명분으로 항주로 내려가 서호의 빌라에 머물렀는데, 당시 중앙정치는 부주석 고강(高崗, 1905-1954 Gao Gang)과 중공중앙조직부
‘중국공산당 바이러스’(CCP Virus)로도 불리는 역병의 진앙지, 우한(武漢)이 있는 중국 후베이성 사람들은 중국 내에서, ‘잠재적 보균자’ 취급을 받는, 편견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중국 당국은 녹색·황색·적색의 세 가지로 분류되는 ‘건강QR카드제(制)’를 실시하면서 녹색 코드를 인증 받은 후베이인들은 자유롭게 전국통행을 허가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정작 베이징은 후베이인(人)들의 입경을 봉쇄하고 있으며 다른 성(省)에서도 후베이인들은 녹색 코드를 제시해도 강제로 격리되거나 쫓겨나기 일쑤다. ‘후베이인이’라는 신분자체가 독일 나치
11월 9일을 기억하시는가? 바로 “일제가 가장 두려워한 암살·폭파전문 비밀결사”였다는 의열단이 창립된 지 100주년 되는 날이다.이 날을 기념하기 위해 벌써부터 김원봉을 띄우는 각종 이벤트와 퍼포먼스, 학술대회가 진행되고 있고, 김원봉과 의열단을 칭송하는 콘텐츠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항일, 무장투쟁이 시대의 대세가 되다 보니 이승만의 외교독립론, 김성수 등의 준비론 같은 이슈는 함부로 입밖에 내지도 못할 험악한 분위기가 엄습하고 있다. 선명한 무장투쟁의 주인공 김원봉, 신채호가 역사의 아이콘으로 밤하늘의 별처럼 빛나고 있는데
[편집자 주] 이승만 대통령의 아들 이인수 박사가 김용옥 씨를 사자 명예훼손죄로 고소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여운형, 송진우, 장덕수, 김구의 살해를 지시했으며, 여수 순천 반란사건 당시 "어린아이까지 다 죽이라"는 학살 명령을 내렸으며, 미국이 한국을 분할통치하기 위해 데려온 '미국의 괴뢰'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고령으로 거동이 편치 않은 이인수 박사는 이승만학당을 운영하고 있는 이영훈 전 서울대 교수에게 고소 대리인을 맡아줄 것을 제의했고, 이영훈 교수는 이에 동의하여 고소 대리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 글은 이영
문재인 대통령이 열심히 띄우려다 브레이크가 걸린 김원봉과 그가 만들었다는 조선의용대의 그 후를 추적하면 충격적인 사실이 발견된다. 김원봉은 1941년 조선의용대 주력이 옌안(延安)으로 탈출할 때 왕따를 당해 낙오했고, 그 후 김구와 손잡고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광복군 부사령관을 맡게 된다. 옌안에서 중공군과 함께 활동했던 조선의용대는 조선의용군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일본군의 항복 직전 조선의용군은 만주로 이동하여 중국 인민해방군 164사단, 166사단 조직의 주역이 되었고, 1949년 이 사단이 마오쩌둥의 명령에 의해 북한으로 들어가
지난 4월 30일 새벽 날치기가 자행된 ‘패스트 트랙(신속처리안건)’ 통과로 인해 나라 망가뜨리는 관련법의 입법화가 현실로 닥쳤다. 신속 처리키로 한 선거법 개정안의 겉모습은 번지르르한 말잔치로 도배질 되어 있다. 하지만 내년 총선에서 좌파연합이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국회 의석의 3분의 2를 차지하여 사회주의 내지 낮은 단계의 연방제 통일로 나가는 헌법을 기필코 쟁취해 내겠다는 것이 저들의 속내다.공수처 설치법? 고위 공직자와 그 가족의 부정부패를 엄하게 단속하는 법 정도로 알고 계신가? 진짜 목적은 따로 있다. 민변과 시민단체
[文革春秋: 現代中國의 슬픈 歷史] 34回. “黑苗와 白描의 辨證法” 1. 혁명이냐, 생존이냐? 대약진운동의 처참한 실패 이후 중공지도부는 두 패로 갈렸다. 모택동이 주자파(走資派, 자본주의의 길을 가는 세력)라 비판했던 개혁세력은 대기근의 참사를 수습하고 파탄지경에 이른 경제를 회복하려는 실용주의자들이었다. 반면 모택동이 이끄는 강경세력은 자력갱생의 구호 아래 핵무장을 추진하는 한편 계급혁명의 깃발을 내걸고 이념투쟁을 이어가고 있었다. 1961-1965년 사이 유소기와 등소평에 의한 경제개혁이 한참 진행될 때, 실제로 이 두 세력
인류사최대의 기근 (3): "언론이 인민을 굶겨죽이다!"[文革春秋: 現代中國의 슬픈 歷史] 29. “人類史 最大의 饑饉”(3) "言論이 人民을 굶겨죽이다!" 1. 노병의 직언, 정치적 자살 1959년 7월 2일부터 강서성 여산에서 개최된 중공중앙의 정치국 확대회의에서 팽덕회는 서북소조(西北小租)에 배속되었다. 대약진 당시 중국 서북지역의 상황을 점검하는 토론분과였다. 토론 과정에서 팽덕회는 당시 중국전역에서 발생하는“좌의 오류”를 지적하기 시작했다. 우선 그는 대약진운동 과정에서 정부조직에 만연해 있던 모럴해저드를 뼈아프
충북 충주시 충일중학교 진로교사인 U씨는 4일 수업시간에 김용옥 한신대 석좌교수가 지난 2006년 광주MBC에서 강연했던 '동아시아 30년 전쟁과 광주항쟁'이라는 제목의 유튜브 동영상을 수업자료로 사용하다 김 교수의 강연 내용에 문제를 삼은 학생 C군과 논쟁을 벌였다.해당 동영상은 김용옥 씨가 '6.25전쟁은 남침과 북침을 따지는 것이 중요하지 않고 중국 내부에서 벌어졌던 마오쩌둥과 장제스의 국공내전의 하나의 고리에 불과하다'거나 '한반도를 비롯한 동아시아 내전의 책임은 궁극적으로 일본에 있다
인류사최대의 기근 (2): "정치가 인민을 굶겨죽이다!"[文革春秋: 現代中國의 슬픈 歷史] 28回. “人類史 最大의 饑饉”(2) 대약진은 대기근으로 귀결되었다. 1958년-1962년 중국 전역에서 3천6백만에서 4천5백만 명이 아사(餓死)했다.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굶어죽어야만 했을까? 인류사 최악의 대기근의 와중에 대체 중공정부는 무엇을 하고 있었나? 살아남은 사람들은 무엇을 했던가? 1998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아마르티아 센(Amartia Sen, 1933)은 “언론의 자유가 있는 민주국가에서 대규모 기근이 발생한 사례는
[文革春秋: 現代中國의 슬픈 歷史] 10回. “反外勢 孤立主義의 어리석음” 1. 백년국치(百年國恥)내겐 1995년 여름 하얼빈 공업대학 교정에서 우연히 알게 되어 20년 넘게 우정을 쌓아온 산동 출신의 오랜 친구가 한 명 있다. 고교시절 공산당에 입당했다는 그는 현재 심천(深川)의 공업단지에서 풍력발전 사업으로 꽤나 성공한 벤처 사업가로 활약하고 있다. 몇 년 전 홍콩의 학회 참석 차 심천에 들러 오랜만에 회포를 풀 때, 그는 내게 직접 써서 블로그에 올린 오언절구(五言絶句) 한 수를 보여주었다. 이 몸은 티끌처럼 작지만 (我身本尘
[文革春秋: 現代中國의 슬픈 歷史] 8回. “人民民主獨裁의 悲劇" 1. 문혁(文革)의 기원 왜 우리는 “문혁”을 탐구하기 위해 부득이 1940년대 국공내전까지 거슬러 올라야만 했나? 중화인민공화국은 국공내전의 승리를 통해 성립되었기 때문이다. 중국헌법에 따르면, 국공내전에서 중국공산당의 승리는 “모택동 영도 아래 중국의 인민들이 장시간의 무장 투쟁을 통해 제국주의, 봉건주의, 관료·자본주의를 무너뜨린” 위대한 “신민주주의혁명”이다. 헌법 전문(前文, 서언)은 “중국의 인민이 국가의 독립, 민족해방 및 민주자유를 위해 간단없이 영웅적
[文革春秋: 現代中國의 슬픈 歷史] 7회. “土地改革殘酷史!” 국공내전이 한창일 때 공산당이 점령한 “신(新)해방지”에선 급속하게 공산혁명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 핵심은 토지개혁이었다. 공산당 지도부는 당시 중국 전역의 농촌에서 대략 10프로의 농민이 지주(地主) 혹은 부농(富農)이라 단정했다. 토지개혁은 바로 그 지주와 부농 소유의 토지를 압류해 중농(中農)과 빈농(貧農)에 재분배하는 과정이었다. 중국정부의 선전에 의하면, 토지개혁은 지주, 한간(漢奸, 친일매국노), 국민당부역자, 토호 등등 소수의 적인(敵人)을 제거하고 다수의
[문혁춘추: 현대중국의 슬픈 역사] 6회. “인민해방군과 인해전술” 1. 국공내전의 클라이막스, 회해전역(淮海戰役)! 1948년 10월 11일, 금주(錦州) 함락 나흘 전, 만주에서의 승리를 확신한 모택동은 남경 북쪽으로 100마일 떨어진 회수(淮水) 일대에 50만 대군의 투입을 결정한다. 중부 평원을 타고 장강(長江)으로 진격해 남경과 상해를 넘보는 작전이다. 만주에서 파견된 공군(共軍)은 북경 지역의 일부 세력과 합류해 놀라운 속력으로 중부 평원으로 몰려간다. 불과 1달이 못돼 공군은 강소(江蘇), 안휘(安徽), 하남(河南)성에
[文革春秋: 현대중국의 슬픈 역사] 5. “해방, 인민을 삼켜버린” 1. “장춘홀로코스트” 최후의 작전1948년 2월 23일자 미국 타임지의 기사에 따르면, 만주 지역은 이미 99프로가 인민해방군에 점령된 상태다. 국민당군은 육로 보급이 다 끊긴 채로 장춘, 심양, 길림, 사평 등의 도시에 갇혀 있다. 붉은 공군(共軍)의 바다에 푸르스름한 국군(國軍)의 섬들 몇 조각이 둥둥 떠 있는 형국이다. 타임 특파원의 표현을 빌자면, 인민해방군에겐 이제 마지막 소탕(mop-up) 작전만이 남아 있다. 석달 후, 1948년 5월 말, 본격적으로
[文革春秋: 현대중국의 슬픈역사] 4회. “1948년 장춘 홀로코스트”(II) 1. 혁명의 성전(聖戰), 최후의 전술 1948년 5월 23일에서 10월 19일까지 5개월 간 지속된 장춘포위전에서 스러져간 난민은 최소 12만에서 최대 60만까지 헤아린다. 현재 대만과 홍콩에서 주목 받고 있는 대륙의 비판적 지식인 두빈(杜斌, 1972- )의 (2017년 작)에 따르면 1948년 그 현장에서 37만이 아사했다. 희생자의 정확한 숫자는 영원히 못 밝힐지 모르지만, 최근까지도 장춘의 공사현장에선 대량의 유골이
[문혁춘추: 현대중국의 슬픈 역사] 3회. “1948 장춘 홀로코스트 (I)” 오늘날 중국헌법 전문에는 중국공산당의 지도 아래 모든 중국 인민들이 대단합하여 "제국주의, 봉건제도, 관료자본주의의 지배"를 무너뜨리고 "신민주주의 혁명"을 통해 중화인민공화국을 건립했다고 기술되어 있다. 그런 중국공산당의 자체 선전과는 별개로 "중화인민공화국"은 과연 어떤 과정을 통해서 성립되었는가? 어떤 정치적 결단, 군사적 전략을 통해서 그 참혹한 국공내전에서 군사적 열세를 극복하고 "위대한 승리"를 쟁취했던 것일까? 앞으로 3회에 걸쳐 중국인들은